과학 이야기
나노, 머리카락 10만분의 1 크기
고성능 車부품·배터리 기술에 쓰여
의약품까지 적용 영역 확대돼
노벨물리학상 받은 파인만 교수
"원자 제어하면 과학발전 급가속"
[ 박근태 기자 ] 2015년 암에 걸린 사실을 공개했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그해 말 완치를 발표했다. 당시 흑색종이 간과 뇌로 퍼졌다고 진단받았지만 키트루다로 불리는 나노기술이 접목된 새 면역항암제 치료를 받고 회복했다.
미국 과학자들은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를 대표적인 ‘100% 나노기업’으로 꼽는다. 더 적은 전기 소모로 훨씬 멀리 가도록 하기 위해 테슬라 전기차에는 완전히 새로운 차체, 부품, 고성능 배터리가 사용되는데, 여기에 나노기술을 적용했다.
이렇듯 나노기술의 쓰임새는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12~13일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제15회 한·미 나노포럼에서는 더 발전된 나노기술 청사진이 제시되기도 했다. 병든 세포만 골라 치료하는 의약기술, 사물인터넷(IoT)과 연결해 미세한 환경오염까지 감시하는 나노센서까지 개발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원자를 재료로 쓰는 신(新)제조기술
‘나노’란 말은 그리스어에서 난쟁이를 뜻하는 ‘나노스’에서 유래했다. 한국에선 1968년 유한양행이 국내 기업 최초로 나노초(1ns=10억분의 1초)급 처리속도의 컴퓨터를 도입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5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320ns 처리 속도의 국산 컴퓨터를 개발했다는 소식이 나노에 대한 관심도를 높였다.
나노를 길이로 사용한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로 아주 짧다. 사람의 머리카락 지름이 10~100마이크로미터(㎛·1㎛=100만분의 1m)인데 1㎚보다 1만~10만 배가량 굵다고 보면 된다. 1㎚는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 3~4개에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나노 세상은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에 가깝다.
과학자들이 나노 세계에 주목하는 것은 막강한 잠재력 때문이다. 기존 제조업이 일정 크기의 물질을 깎거나 가공해서 부품이나 제품을 생산한다면 나노기술은 원자 하나하나를 블록처럼 쌓거나 옮겨서 원하는 제품을 만드는 방식이다.
그동안 반도체산업에서는 웨이퍼를 깎아 칩을 생산해왔다. 나노기술을 활용한 단일원자 전자공학은 원자들을 이어 회로를 구현할 수 있다. 선폭이 10㎚대인 지금의 반도체 칩보다 훨씬 더 저장용량이 크고, 작은 칩을 제조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나노기술을 활용하면 자원도 아낄 수 있다. 성능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만 쓰고, 원자를 조립할 때 에너지도 적게 들어 자원 낭비를 줄일 수 있다.
나노 세계에선 화학적인 성질과 전기적인 속성이 달라지는 마법 같은 일마저 벌어진다. 금 분말이 20㎚로 작아지면 색깔이 노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뀐다. 디스플레이에서 색을 내는 퀀텀닷(양자점) 역시 굵기가 가늘어지면 색상이 바뀐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칼텍) 교수(1918~1988·사진)는 1959년 한 강연을 통해 “바닥에는 풍부한 공간이 있다”고 말했다. 원자를 각각 제어하면 과학의 발전 속도가 훨씬 빨라질 수 있다며 나노기술의 등장을 예고했다. 1981년 원자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원자현미경이 발명된 데 이어 1989년 IBM 연구진이 원자 35개를 움직여 만든 IBM 로고를 공개하면서 그의 주장은 현실이 됐다.
이를 계기로 과학자들은 각 실험실에 흩어져 있던 기술을 활용해 나노 세상을 구현할 부품을 하나둘 만들기 시작했다. 튜브 모양의 탄소 덩어리인 탄소나노튜브는 강도와 전기 전도도, 열전도도가 뛰어나 초창기 가장 촉망받는 소재로 주목받았다.
얇은 단원자층을 이루는 2차원(평면) 소재인 그래핀도 등장했다. 과학자들은 이들 소재로 일반 반도체보다 성능이 뛰어난 전자소자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후에도 이중 탄소나노튜브, 그래핀을 잘라 만든 나노리본, 유전자와 금속나노입자를 결합한 유전자(DNA) 나노입자, 분자 한 가닥으로 만든 나노선 등 다양한 소재가 나타났다.
공기 속 탄소·수소 합성물질 나올 수도
나노부품과 공정을 이용한 제품들은 생활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운동화, 골프채 같은 스포츠 용품을 비롯해 항공기 날개와 차량 도료 등에 나노소재가 사용되고 있다.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고성능 반도체를 평면 대신 입체 구조로 제작하는 ‘핀펫(FinFET)’ 기술도 나노기술이다. 태양광, 수처리 분야는 물론 최근에는 나노의학과 IoT 등으로 나노기술 적용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이내응 성균관대 교수는 이번 한·미 나노포럼에서 나노화합물을 이용해 만성질환자를 모니터링하는 바이오마커용 나노센서 기술을 소개했다. 조영남 국립암센터 교수는 검사에서 잘 드러나지 않고 혈관 내를 돌아다니는 순환종양세포(CTC)만을 선택적으로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공개했다. 대다수 과학자들은 언젠가 공기에서 탄소와 수소, 산소 분자를 얻어 원하는 물질을 합성할 날이 올 것으로 보고 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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