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이 넘치는 쿠바여행 (4) 산티아고 데 쿠바 下
혁명가 카스트로 어머니
아들의 무사귀환 기원하며
코브레 성당에 성모상 봉헌
유네스코 문화유산 모로성
정상에 오르면 도시 한눈에
눈 돌리면 카리브해가 펼쳐져
어느 삶이든 간절하지 않으랴. 산속에 숨어든 카스트로 형제를 위해 기도하던 어머니의 기원이 가득한 곳,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망향의 비가가 들려오는 곳, 성스러운 기적을 일으키는 자선의 성모가 모셔진 곳이다. 살기 위해 거대한 성채를 쌓고 투쟁을 했으며 또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구리를 캐며 노예의 삶을 살았던 곳이다. 혁명, 종교, 전쟁 모두가 간절한 삶에서 생존을 위한 희구였다.
혁명 성공의 단초 몬카다 병영
1953년 7월26일,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반기를 든 젊은 변호사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이 몬카다 병영을 기습 공격했다. 이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약 120명의 혁명군 중 절반인 61명이 총격전과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카스트로도 체포돼 15년형을 받았다. “역사가 나를 사면하리라”고 자체 변론을 하면서 농지 개혁과 노동자 문제 등 일련의 혁명 이념을 제시했다. 그는 ‘카리브 해에 떠 있는 청춘’이란 뜻인 후벤투스 섬의 감옥에서 2년여의 형을 살다 사면받아 멕시코로 망명했다.
카스트로는 멈출 줄 몰랐다. 82명의 혁명군을 이끌며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배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에 상륙했다. 70명은 작전 중에 사망하고 12명이 살아남아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3년여에 걸친 투쟁으로 마침내 쿠바 혁명을 이뤘다. 몬카다 병영 기습 공격이 혁명 성공의 단초 역할을 했다. 7월26일은 쿠바의 혁명 기념일이다. 노란색 외관의 2층 건물로 박물관 외벽에는 그날을 기억하려는 듯 아직도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학교 건물로도 쓰고 있는 박물관 입구의 한 교실에는 초등학생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랴 방문객의 카메라 세례를 받으랴 귀여운 눈길을 보낸다. 쉬는 시간이 되자 쏟아져 나와서 너른 운동장에서 뛰어논다. 이 박물관에서 나와 앞을 바라보면 마에스트라 산맥이 도시를 빙 둘러싸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혁명의 발상지에는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쿠바서 가장 신성한 엘 코브레 성당
코브레는 스페인어로 ‘구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엘 코브레 성당은 산티아고 데 쿠바의 중심지에서 북서쪽으로 20㎞ 정도 떨어진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 아래 언덕 위에 지어진 성당이다. 성당 건물도 구릿빛을 닮았는지 황동색처럼 보인다. 버스는 일행을 코브레 성당을 잘 조망할 수 있는 길가에 내려준다. 푸른 산맥을 배경으로 성당을 우러러보며 지나가는 쿠바의 올드카나 오토바이를 집어넣고 한 컷을 찍으면 어울리는 곳이다. 길옆에는 자선의 성모에게 바치는 노란 화환과 미니어처를 파는 행상이 줄지어 있다. 이 지역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들이 구리를 채굴하던 곳이다. 이곳 구리 광산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부르던 노래와 리듬이 손(Son)과 살사의 기원이라고 한다. 유서 깊은 쿠바 문화의 진원지 같은 곳이다.
1606년에 3명의 어부가 폭풍으로 바다에서 조난당해 힘들게 파도에 떠도는 나무조각을 붙잡고 해변에 도착했다. 그 나무조각에는 아름다운 마리아 상이 새겨져 있었다. 목숨을 잃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상을 코브레 성당에 모셨다. 그 조각상에는 ‘나는 자선의 성모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1926년 지금의 교회가 세워졌다. 쿠바에서 가장 신성한 순례지다.
쿠바의 카치타(Cachita)라고 불리는 수호 성녀인 자선의 성모의 성지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의 토속신앙과 가톨릭이 혼합해 탄생한 쿠바의 종교 산테리아에서는 이 수호 성인을 나이지리아 오순강의 수호 성인 오순(Oshun)과 동일시한다. 오순은 강과 맑은 물의 신인 동시에 사치와 쾌락, 성과 다산, 아름다움과 사랑의 신이기도 하다. 이 신은 운명과 점술에도 연결돼 있다. 이 여신은 종파를 떠나 쿠바인의 가슴속에 만사형통하는 신인 셈이다.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사투를 벌이고 있던 두 아들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의 무사를 기원하기 위해 그들의 어머니 리나 루스는 1957년 성모상 앞에 작은 게릴라 상을 봉헌했다. 그 덕분인지 혁명은 성공하고 60여 년 동안 형제가 정권을 독점했다. 이 성모상에 봉헌하면 60년 가까이 기도발이 먹힌다는 증거는 아닐까? 이제 쿠바도 카스트로 형제의 권력이 아니라 새로운 인물이 지도자 자리를 이어받았다.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해 자유와 평화 그리고 정의에 대한 미사를 집전한 곳으로 쿠바인 신앙의 중심지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받고 이곳에 23캐럿짜리 기념 금메달을 기증했다. 이 메달은 1980년대 한 차례 분실 사태를 겪은 뒤 바로 되찾았으나 대중에게는 비공개 상태다. 헤밍웨이는 “나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쿠바 입양인이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도 산티아고 노인이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면서 독백처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이 성당이 언급된다. 노인은 “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면 주기도문과 성모문을 열 번이라도 외우겠다고 다짐한다. 실제로 잡게 된다면 코브레 성당의 성모 마리아님에게 순례를 떠난다”고 약속한다. 그 약속을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메달을 코브레 성당의 성모상에 봉헌함으로써 지켰다.
파란색 하늘과 녹색의 산을 배경으로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어 멀리에서도 잘 보인다. 막 걸음걸이를 익히기 전후의 수많은 어린이가 부모의 품에 안겨 하얀 옷을 입고 신부의 세례를 기다리고 있다. 쿠바 산골의 한적함과 종교적 성스러움이 스치면서 지친 여행객에게 충만한 위안을 준다. 성당 안에서는 세례식이 펼쳐지고 축도의 음성이 낭랑하게 성당을 울린다. 신도에게나 여행자에게나 절대자에게 순종으로 이끄는 마법의 공간이다. 성당 밖은 정오로 향하는 햇살이 푸른 능선을 배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모로성
문명은 도시를 만들고 성을 쌓아서 야만과 구별 짓는다. 배를 타고 대양을 다니는 해적과 외국 함대를 방어하기 위해 섬나라인 쿠바는 항구 외곽의 포구에 어김없이 요새를 건설했다. 모로성은 카스티요 델 모로 산 페드로 데 라 로카라는 긴 이름이 정식 명칭이다. 산티아고 데 쿠바의 연안부에 있는 성채다. 시 중심부에서는 약 10㎞ 떨어져 있다.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완벽에 가까운 성채로 1638년 도시 방어용으로 건축됐고, 1962년 복원됐으며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제일 높은 곳에 오르면 높이가 60m로 멀리 산티아고 데 쿠바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바깥 바다로 눈을 돌리면 아득히 멀어서 끝이 없는 카리브 해가 햇빛에 반짝이며 눈앞 가득히 펼쳐진다.
이 도시는 아바나보다 깨끗하다. 건물은 더 오래됐으나 건물 높이나 밀도에서 아바나의 올드아바나보다 조촐하다. 그런 이유로 관리가 더 편했을 수도 있다. 아바나와 다른 매력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푸른 산과 마주한다는 점이다. 도시로 들어오는 포구의 크기와 방어 요새인 모로성의 규모도 아바나보다 훨씬 컸다. 아바나가 오밀조밀한 만화 같은 스케치로 표현할 수 있는 도시라면 산티아고 데 쿠바는 목가적 동화 이야기의 무대 같은 도시다.
글= 최치현/사진=정윤주 여행작가
maode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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