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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 칼럼] '갑질(gapjil)'과 '기수(ki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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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영국의 옥스퍼드사전은 ‘영어사전의 대명사’로 통한다. 1928년 표준판을 발간할 때까지 44년간 1500여 명의 학자가 참여했다. 2000년부터는 온라인판만 내지만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시대 변화를 반영하는 단어들을 3개월마다 새로 등재하고 있다.

한국어도 꽤 많이 수록돼 있다. 1990년대까지는 ‘김치’ ‘막걸리’ ‘온돌’ ‘태권도’ ‘양반’ ‘기생(妓生)’ ‘시조’ 같은 고유명사가 주를 이뤘다. ‘불고기’ ‘소주’ 등 식음료 관련 단어에 이어 한류상품인 ‘K팝’도 이름을 올렸다. 미국의 웹스터사전에도 ‘합기도’ 같은 우리말이 올라 있다.

영어사전에 오르는 단어들은 국제적으로 얼마나 널리 쓰느냐를 기준으로 선정한다. 그만큼 많이 알고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한 국가의 문화나 의식 구조, 행동 양태를 나타내는 단어가 많다.

한국 고유의 사회 특성에서 비롯된 영어 단어 중 하나는 화병(火病·hwabyung)이다. 화가 쌓여 스트레스성 장애를 일으키는 정신질환을 뜻하는 이 말은 미국 정신과협회가 문화 관련 증후군의 하나로 등록했다. 대가족제와 가난,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화가 나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풍토에서 생긴 병이라는 뜻이다.

최근에는 ‘갑질(gapjil)’이라는 단어가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어제 대한항공 전무의 물 컵 사건을 보도하면서 ‘갑질’을 ‘중세시대 영주처럼 부하직원이나 하도급업자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재벌(chaebol)’ 가족이 반복적으로 연루되고 있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한국 사회의 경직된 조직문화를 일컫는 ‘기수(期數·kisu)’도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 1월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각종 임용고시와 신입사원 채용 방식, ‘몇 기 출신이냐’를 따지는 관습을 지적하며 “조직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저해하는 보이지 않는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갑질’이나 ‘기수’는 도제식 훈련과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폐쇄적 사회의 병폐다. 이른바 단일민족론에 바탕을 둔 ‘교조적 순혈주의’는 아직도 한국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갑질’ ‘기수’ 같은 부정적인 단어가 영어사전에 곧 오를지 모른다. 그나마 긍정적인 단어도 몇 개 되지 않는데 우울한 단어가 늘어난다면 이 무슨 망신인가.

말은 그 사람의 품격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언어공동체의 수준이나 문화적인 성숙도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게다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고 했다. 국민소득 3만달러를 앞둔 시기에 ‘갑질’ 같은 부정어 대신 ‘신바람’ ‘흥’ ‘끼’ 같은 긍정어가 영어사전에 많이 등재되길 기원한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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