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03일(14:41)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저를 저승사자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자본시장 관련 규제에 대해서는 정무위원 시절 (국회와 정부) 중간에서 많이 풀어냈습니다.”
김기식 신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2일 취임식 직후 기자실을 방문해 이 같이 말했다. 그를 규제 강화론자로 바라보는 시각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2012년 5월 비례대표를 통해 제 19대 국회의원에 입문한 그는 금융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를 담당하는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 중 가장 ‘넘기 힘든’ 의원으로 공무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다. 정부가 정무위에 제출한 법안을 구석구석 지적하며 제동을 걸었던 탓이다.
그런 그가 ‘중간에서 풀어냈다’고 밝힌 자본시장 규제 중 하나는 2012~2013년까지 국회에서 진통을 겪었던 자본시장법 개정안이다. 김석동 금융위원장 시절 금융위는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만들기 위한 대형 투자은행(IB) 육성과 혁신기업을 상장하는 코넥스 시장 신설 등을 포함한 방대한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만들었다.
김 원장이 국회에 입문한 후 정무위에서 처음 맞딱뜨린 대형 법안이 바로 이것이었다. 금융위 관계자는 “당시 김 의원은 수 백 페이지 짜리 개정안에 형광펜으로 촘촘히 밑줄을 긋고 20여개의 미비점을 쉴 새 없이 지적했다. 정무위는 그의 독무대였다”고 기억했다.
당시 금융위는 김석동 위원장과 추경호 부위원장(현 자유한국당 의원), 김용범 자본시장국장(현 금융위 부위원장), 김학수 자본시장과장(현 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 등 ‘최강의 복식조’로 꾸려졌지만 새내기 의원이었던 김 원장의 허를 찌르는 공격에 첫 소위에선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이후 미국, 유럽 등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후속대책으로 IB 규제 강화에 나섰고 정치권에선 경제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심한 반발에 부딛혔다. 대형 IB를 준비하기 위해 KDB대우증권(현 미래에셋대우) 삼성증권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현대증권(현 KB증권) 등 증권사들은 이미 총 3조5000억원을 투입하고 자본시장법 개정을 손꼽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그때 김 원장이 꺼낸 카드가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 금지였다. 자본시장법 개정안에 ‘분리형 BW’발행을 전면 금지하는 안건을 포함하자는 것이다. 김 원장은 참여연대 사무총장 시절부터 삼성SDS, 두산 등이 발행했던 BW가 경영권 승계에 악용된다며 BW 발행을 금지해야한다고 주장해왔다. 2013년 4월, 대형IB 육성 등을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BW 전면금지 안건이 포함돼 국회 정무위를 통과했다. 김 원장이 말한대로 자본시장 규제 완화에 힘을 더한 대목이다.
그러나 자본시장법 개정이후에 문제가 발생했다. 연간 3조원에 달하던 BW 시장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BW는 신주를 인수할 수 있는 권리, 즉 워런트가 붙어 있는 채권이다. 일반 회사채보다 금리가 낮아 기업들이 낮은 비용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투자자들은 발행 기업의 주가가 상승하면 워런트를 행사해 차익을 얻을 수 있고, 분리형 BW의 경우 따로 워런트만 떼어 팔 수 있어 인기를 끌었던 금융상품이다. 당시 BW는 모두 분리형으로 발행됐다.
분리형 BW 발행이 전면 금지되자 자금조달이 긴급한 한계기업과 중소기업의 자금줄을 막는 역효과가 났다. 심각한 부작용으로 2년만에 공모형 BW에 대해서는 발행이 허용됐다. 2013~2015년 사이 죽었다가 살아난 BW는 법안의 바터(교환) 관행, 시장을 무시한 외골수 입법이 낳은 참극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결국 김 원장은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자본시장의 저승사자가 맞았던 셈이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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