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규칙을 지키는 '자연법'만으론 안 된다고 봤죠
국가 공권력으로 사회계약을 지키게 하자는 주장이죠"
자연상태는 ‘죄수의 딜레마’ 상태
홉스가 말한 자연 상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기적인 인간은 모두가 두려워할 만한 공동의 힘, 즉 공권력이 없는 경우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해 전쟁 상태에 있게 된다. 이런 전쟁 상태에서 인간은 폭력적 죽음과 공포 속에 늘 살고 있다. 여기에서는 땀 흘려 일할 이유가 없어진다. 노동의 성과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 예술, 문화가 나타날 수 없고 도덕이나 정의도 없다.
이와 같은 자연 상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홉스는 자연법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여기서 자연법이란 개개인의 생존, 즉 자연권을 보장받기 위해 모두가 규칙을 지키자는 합의를 의미한다. 최소한 서로의 ‘자연권’은 지켜주자는 것이다. 예컨대 자연법은 “다른 사람이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베풀라”와 같은 것으로서 이는 곧 인간 이성의 명령이다. 그런데 자연 상태에 있어서 이기적인 인간들 간에는 설령 각자가 자기 보존을 위해 자연법을 지키자는 계약에 합의한다 할지라도 서로가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리라는 데 대해 신뢰하지 못한다. 결국은 모두가 자연법을 준수하리라는 계약의 이행을 보장할 길이 없다는 점에서 홉스가 말하는 자연 상태는 바로 ‘죄수의 딜레마’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
죄수의 딜레마는 상호 협력일 때 가장 큰 이익이 주어지지만, 상대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손익이 달라지므로 상대방의 협력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결국 서로 배반하게 되고 최선의 대안을 놓치는 상황을 일컫는다. 이 개념은 프린스턴대의 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앨버트 터커가 심리학자들을 상대로 게임이론을 강연할 때 사용하면서 ‘죄수의 딜레마’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됐다.
이제 죄수의 딜레마 모형을 가지고 홉스가 말하는 자연 상태를 분석해보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는 모든 사람이 자연법을 ‘배반’하는 전략을 선택한 상태다. 그러나 홉스가 보기에 이와 같은 전쟁 상태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전쟁보다 평화를 선호한다. 평화의 상태는 모든 사람이 자연법에 ‘협조’하는 전략을 선택한 상태로서 최선의 대안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정착되려면 모든 사람이 자연법에 배반하기보다 협조하는 전략을 선택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 상태에서는 합리적 대안이 있지만 모두가 자연법에 협력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데 있다. 즉 모두가 최선의 대안인 평화를 원하면서도 자연법에 협조하는 방안을 선택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방을 공격함으로써 최악의 대안인 전쟁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강력한 공권력이 없을 경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협력적으로 대하는 것은 불합리한 전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전략은 남이 언제든 나를 배신하고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준비하며, 여건이 허락할 때에는 다른 사람을 공격해 이익을 취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이 없는 계약은 빈말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상호 간의 계약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권력을 확고하게 세우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서로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기로 약속하는 사회계약을 맺은 뒤 이런 사회계약의 준수를 보장하는 국가에 강력한 공권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홉스가 보기에 이것만이 자연 상태의 불안정한 상황을 극복하고 평화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모든 사람이 계약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상호 신뢰가 사회계약의 핵심이지만, 국가가 없는 사회계약은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실효가 없다는 점을 홉스는 갈파한 것이다. 법을 만들고 범법자를 처벌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사회적 약속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홉스가 생각한 국가의 역할이다. 이런 맥락에서 “칼이 없는 계약은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새삼 힘을 받는다. 서울국제고 교사
◆기억해주세요
모든 사람이 계약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상호 신뢰가 사회계약의 핵심이지만,
국가가 없는 사회계약은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실효가 없다.
김홍일 < 서울과학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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