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란 기자 ]
25년 전통의 유럽연합(EU)이 내우외환(內憂外患)에 휩싸였다. 안으로는 EU의 영향력 강화
에 반대하는 ‘유럽 회의주의(Euroscepticism)’가 확산하고 있다. 밖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무역전쟁’ 도발이 한층 가시화되고 있다.
EU의 양대 축인 프랑스와 독일 정상은 다급한 분위기다. 오는 14일 4기 내각 출범을 앞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르면 다음주 첫 공식 외교 행보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만날 예정이다. 미국의 1조5000억달러 감세에 대응해 법인세율을 낮추는 문제부터 이민, 은행권 재정지원,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구조개혁 등 EU 내부 문제까지 이들 앞엔 적잖은 과제가 놓여 있다.
최근엔 의외의 복병도 등장했다. 유로존 경제 규모 3위 이탈리아다. 이탈리아는 지난 4일 치러진 총선에서 중도좌파, 중도우파 정치권이 참패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아든 반면 반(反)체제 포퓰리즘(오성운동)·극우(극우동맹) 정당이 50%에 달하는 득표율을 올렸다. 제1당을 차지한 오성운동과 내각 구성에 ‘지분’이 있는 극우동맹이 누구와 함께 갈지에 EU 향방이 달렸다.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야로슬라프 카친스키 폴란드 집권 ‘법과 정의당’ 대표와 한편에 서서 반EU 행보를 이어갈 것인지, 마크롱 대통령 및 메르켈 총리와 함께 유럽 개혁에 나설 것인지가 관심이다.
이탈리아 총선 결과는 유럽 회의주의가 얼마나 폭발력이 있는지 보여준다. 2012년 이후 유럽 전역에서 득세한 반체제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 정당은 자국의 기성 정치권과 EU에 대한 불신을 기반으로 한다. 2015년 그리스에서 긴축재정에 반대하며 급진좌파당 시리자가 집권했을 때도 유로존 탈퇴 우려가 고조됐다. 이듬해 6월 영국의 브렉시트(EU 탈퇴) 결정으로 EU의 균열은 수면 위로 드러났다.
2017년 5월 프랑스 대선과 9월 독일 총선에서 각각 국민전선, 독일을 위한 대안(AfD) 같은 극우정당이 상당한 득표율을 올렸다. 동유럽 4개국(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은 EU의 난민 할당제 추진과 사법권 개입에 반발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앞세워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동유럽의 권위주의 정권은 서유럽의 자유주의·개인주의 가치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북유럽 국가(덴마크·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도 최근 선거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20%에 가까운 득표율을 올렸다. 네덜란드에서도 극우 자유정당이 제2당을 차지했다.
EU가 당면한 포퓰리즘과 균열의 위기를 헤쳐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 뿌리엔 일자리 문제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유럽 실업률이 급등했다. 중·하층 노동자는 자동화와 저임금을 앞세운 개발도상국에 일자리를 뺏겼다. 얀 알간 파리정치대 교수팀이 2000~2017년 유럽 26개국 220개 지역을 분석한 결과 실업률이 1%포인트 상승할 때마다 포퓰리즘 정당의 선거 득표율도 1%포인트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관관계는 실업률이 높은 남유럽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번 이탈리아 총선에서도 실업률이 높은 지역(시라큐스 등)일수록 오성운동 지지율이 높았다.
실업률 상승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반체제 포퓰리즘 정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인기 없는 구조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하지만 개혁은 국민들의 신뢰를 요한다. 유권자들이 현재의 고통스러운 개혁 이후에 미래에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정치권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개혁은 쉽게 실행될 수 없다.
유럽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실업률, EU에 대한 불신, 포퓰리즘의 악순환을 끊을 기회 말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직업교육을 위해 연간 320억유로(약 42조원)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했다. 안팎으로 어려움에 봉착한 한국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근 4년 연속 실업률이 높아진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why@hankyung.com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