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해상무역 중심지로 富 과시
침략에 훼손된 중세풍 舊시가지 복원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스톡홀름서 크루즈선 타고 이동 ‘운치’
성 페테르스 성당 오르면 도시 한눈에
성곽도시 25개 문 중 유일하게 남은
‘스웨덴 문’ 에선 침략의 아픔 가득
광장 주변 ‘삼형제 건물’ 도시의 명물
거리 곳곳에는 악사들 연주소리
침탈 겪은 라트비아의 고초 노래한
'백만 송이 장미' 노랫소리 귓가에
길드조합 건물 '검은 머리 마당' 앞엔
세계 최초 'X마스 트리' 자리 표식도
알베르타·안토니야스 거리 거닐면
아르누보 건축물 아름다움에 도취
용·이집트 여신상 조각 꿈틀대는 듯
발트해와 다우가바강이 만나는 항구, 중세 거리를 채우는 클래식 선율, 화려한 아르누보 옷을 입은 건물. ‘발트해의 진주’라 불리는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의 풍경은 몽환적인 화음처럼 어우러진다. 마음을 열고 그 풍경 속을 걷다 보면 영감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2년간 리가에 살며 캐럴 ‘소나무야’를 작곡한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처럼.
발트해를 품은 항구 도시, 리가
노을이 발트해를 적시기 전, 서둘러 리가행 탈링크 로만티카 호에 올랐다. 리가는 북으로는 에스토니아, 남으로는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 한가운데 있는 라트비아 수도로 스웨덴 스톡홀름과 발트해를 마주하고 있다. 아직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톡홀름과 리가를 오가는 크루즈선은 북유럽에선 보편적인 이동 수단이다. 현지인처럼 배 위에서 늘쩡늘쩡 하룻밤을 보낸 뒤 리가에서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스톡홀름항을 벗어나 해안으로 나아갈수록 조각조각 흩어진 섬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노을은 망망대해 위에 가느다란 담뱃불처럼 빨갛게 타오르다 바다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저물어 갔다. 마치 세상의 모든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기라고 하듯이.
이튿날 배 위에서 맞는 아침이 낯설고도 신선했다. 식사를 마치고 갑판에 나서자 리가만(灣) 깊숙이 진입한 배는 다우가바강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 마침내 리가항에 뱃머리를 댔다. 리가라는 도시의 역사도 1201년 독일 브레멘의 알베르트 대주교가 십자군의 일파인 ‘검은 기사단’과 함께 이곳에 닻을 내리며 시작됐다. 개종(改宗)이라는 명목 아래 독일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병합해 리보니아 공국을 건설, 이 땅을 지배했다. 그때부터 라트비아인들은 독일인의 농노로 전락해 수백 년간 고통을 겪었다.
15세기께부터는 뤼베크, 탈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자동맹의 일원이 됐다. 리가가 발트해 연안의 해상 무역 중심지로 성장하며 도시의 모습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8개의 탑과 요새가 온 도시를 휘감았고, 무역상들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를 불러들여 화려한 건물을 올리며 부를 과시했다. 이후 독일·스웨덴·러시아 등에 수없이 외침을 당하며 전쟁으로 성벽이 무너지고 건물이 훼손됐지만, 라트비아인들은 끈기 있게 구시가를 복원했다. 고난과 피지배의 역사가 남긴 찬란한 유산을 아끼는 마음으로 가꿨다. 그 덕에 구시가에는 중세 건물과 자갈길까지 아름답게 보존돼 있다. 1997년에는 구시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중세 거리를 걷다
“리가는 처음 왔어요? 저기 화약 탑 보이죠. 저 안으로 들어가면 구시가예요. 성 페테르스 성당 첨탑에도 꼭 올라가 보세요. 거기서 아름다운 구시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니까요.”
뜻밖에도 택시 기사가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리가항에서 호텔로 가는 동안 가이드로 나설 기세였다. 옛 소련권 나라여서 영어가 안 통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라트비아는 1940년부터 소비에트 연방의 압제에 시달렸고 1991년 소련 붕괴와 동시에 서방에 편입됐다. 올해 비로소 독립 100주년을 맞는다.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구시가로 가는 길, 택시에서 본 화약 탑에 들렀다. 온몸으로 수난의 역사를 겪은 육중한 탑은 전쟁박물관으로 변해 있었다. 전쟁박물관에서 성벽을 따라 5분쯤 걷자 노란색 ‘스웨덴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 리가는 성곽도시로 25개의 문이 있었는데, 모두 사라지고 이 문만 남았다. 스웨덴 문인 까닭은 스웨덴 점령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스웨덴이 이 문을 세운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라트비아는 러시아 지배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때마침 문 아래 한 여인이 라트비아 전통 악기 코클레를 연주하고 있어 그 풍경이 시대극의 서막처럼 다가왔다. 스웨덴 문을 통과하자 중세의 시간이 고여 있는 듯한 트록슈뉴 거리가 이어졌다. ‘소음의 거리’라는 뜻의 이 길은 13세기에 형성됐는데, 지금은 리가에서 가장 좁고 고요한 골목으로 꼽힌다.
조용한 골목을 벗어나자 리부 광장 주변으로 대길드 건물, 그에 맞서는 소길드 건물, 지붕 위 고양이상이 유명한 고양이의 집 등 중세와 아르누보 건축물의 향연이 펼쳐졌다. 특히 성 예캅스 성당 옆 ‘삼형제 건물’이 시선을 끌었다. 15~18세기에 걸쳐 지은 집 세 채가 나란히 서 있어 삼형제 건물이라 불리는 구시가의 명물이다. 오른쪽 흰 건물이 15세기에 탄생한 큰형이고 왼쪽으로 갈수록 100세씩 젊어진다.
가만히 보면 늦게 지은 건물일수록 크기가 작은데, 점점 리가에 집 지을 땅이 줄어서란다. 또 맏형 건물 창문이 제일 작은데 당시 창의 크기에 비례해 세금을 징수한 탓이다. 이처럼 라트비아 건축의 변천사를 한눈에 보여줘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건물 내부에 건축박물관이 자리한다. 삼형제 건물 앞에서도 어김없이 거리의 악사와 마주쳤다. 그렇게 구시가 거리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음악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토록 감미로운 음악이 거리를 환하게 밝혀줄 줄은 몰랐다.
라트비아의 고초 노래한 ‘백만 송이 장미’
구시가의 상징, ‘검은 머리 전당’ 앞에서도 바이올린과 첼로의 이중주가 건물 구경은 뒷전으로 미룰 만큼 애잔하게 울려 퍼졌다. 문득, 러시아 민요로 알려진 ‘백만 송이 장미’가 떠올랐다. 사실 ‘백만 송이 장미’는 리가 출신 라이몬즈 파울스가 작곡한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인생’이 원곡이다. 이 노래를 러시아 가수 알라 푸가초바가 불러 유명해졌고, 가수 심수봉이 번안해 부르며 한국에도 알려졌다. 하지만 원곡에는 ‘백만 송이 장미’라는 가사가 없다. 독일 이후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 등 주변 나라에 휘둘린 라트비아의 고초(苦楚)를 애틋하게 노래할 뿐이다.
한편 광장을 사이에 두고 시청과 마주 선 검은 머리 전당은 15세기 아프리카, 남미를 무대로 무역을 한 청년 상인들이 결성한 ‘블랙 헤드 길드’의 조합 건물이다. 검은 머리 전당이라는 이름은 길드가 수호신으로 삼은 ‘성 마우리티우스가’가 검은 머리의 흑인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검은 머리 전당 앞에는 세계 최초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진 자리도 표시돼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510년 겨울 검은 머리 길드 회원들이 그 자리에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전나무를 세우고 밤새워 파티를 즐긴 것을 시작으로 트리 문화가 전파됐다고 한다.
광장을 빠져나가자 택시 기사가 일러준 성 페테르스 성당이 도시의 주인공처럼 우뚝 서 있다. 성 페테르스는 예수의 제자 성 베드로의 라트비아식 이름이다. 첨탑 꼭대기에 수탉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리가의 첨탑마다 매달린 수탉 모양 풍향계를 처음으로 매단 성당이 바로 이곳이다. 한자동맹 시절, 무역 상인들에게 풍향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 때까지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 얘기한 데서 나왔다고도 한다. 123.5m 높이 첨탑의 72m 지점에는 전망대도 있다. 대부분 첨탑은 헉헉대며 좁은 돌계단을 올라야 전망대에 닿지만, 성 페테르스 성당은 엘리베이터가 있어 오르기 쉽다. 수백 년 세월 동안 무너지고 증축하기를 거듭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까닭이다. 14세기 말, 130m 높이를 뽐내며 완공했지만 벼락을 여러 번 맞고 훼손됐다. 러시아 점령기에 다시 복원했으나,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 후 몇 차례 공사를 통해 1973년 복원하며 층층대 대신 승강기가 있는 첨탑으로 거듭났다.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전망대에 서자 구시가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내려다보였다. 멀리 강 건너 웅장한 라트비아 국립도서관까지 라가의 스카이라인이 시야에 담겼다. 왜 택시기사가 이 성당 위에 올라야 구시가를 제대로 보는 것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알베르타 거리를 수놓는 아르누보의 향연
리가의 아름다움에 취해 걷기 좋은 또 하나의 장소는 아르누보 건물 밀집 지역이다. 프랑스어로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의 ‘아르누보’ 곡선을 강조하고 여신이나 용 등 화려한 부조 장식을 보탠 탐미적인 건축 양식이다.
구시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알베르타 거리를 중심으로 안토니야스 거리, 엘리자베티스 거리 등에 지은 아르누보 건축이 각축장을 이룬다. 건물에 입체적으로 조각된 용이나 이집트 여신상은 툭 치면 살아서 움직일 것처럼 세밀하다. 그 화려함이 당시 리가가 얼마나 부유한 도시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20세기 초 리가 700주년을 기념해 짓기 시작하며 점점 많은 건물이 들어섰다고. 초기에는 이집트, 이슬람 등 요소를 차용한 건물이 대부분이었는데, 아르누보 양식 건물이 늘어날수록 태양, 꽃, 라트비아 전통 문양 등보다 절제된 장식이 주를 이뤘다. 그 배후에는 리가 태생 천재 건축가 미하일 에이젠슈테인과 콘스탄틴 페크센스, 에이젠스 라우베 등 당대 최고의 라트비아 건축가들이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리가는 벨기에의 브뤼셀, 핀란드의 헬싱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르누보 도시로 명성을 날렸다.
알베르타 거리 12번지에는 아르누보 박물관도 있다. 내부도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도록 꾸며놓고, 직원들까지 그 시절의 복장을 하고 안내해주는 이색 박물관이다. 예술 작품 같은 건물을 바라보며 그 거리를 걷는데 자꾸만 콧노래가 나왔다. 어느새 음악을 사랑하는 리가 사람들에게 물든 것 같다. 어쩌면 리가에서 영감을 받아 명작을 남긴 바그너처럼, 서울로 돌아가 멋진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정보
인천국제공항에서 리가까지 직항은 없다. 비행기로 갈 경우 핀에어를 타고 헬싱키를 경유하는 게 가장 빠르다. 속도보다 낭만적인 여정에 방점을 찍는다면 스톡홀름을 거쳐 페리를 타고 크루즈 여행을 즐기는 코스도 좋다. 스톡홀름항에서 저녁 무렵 로만티카 호를 타면 아침에 리가 항구에 도착한다. 뷔페나 러시아 전통 식당 등 입맛에 맞는 선상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도 먹고 밤에는 쇼도 보고, 면세점 쇼핑과 사우나까지 하룻밤의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크루즈선이다. 예약은 여행 떠나기 전 한국어로 된 홈페이지에서 미리 하는 게 좋다. 리가는 라트비아어를 쓰지만, 영어와 러시아어가 잘 통한다. 화폐는 유로를 쓰며 택시비가 저렴한 편이다.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기념품으로는 전통술 발잠, 리넨으로 만든 침구나 식탁보 등이 유명하다.
라트비아=글·사진 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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