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훈 기자 ]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지난 14일 인터넷 정책의 근간인 ‘망(網)중립성(net neutrality)’ 정책을 폐지하면서 국내에서도 관련 원칙을 고수해야 할지를 놓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망중립성은 통신사 등 인터넷서비스사업자(ISP)가 특정 콘텐츠나 인터넷기업을 차별·차단하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이다. 고속도로에 비유하면 도로 관리 주체가 차량 종류나 적재중량, 제한속도 등을 제한할 수 없게 하는 원칙이다. 미국은 망중립성을 폐지하면서 큰 트럭이나 버스, 무거운 짐을 실은 차량 등에 추가 요금을 매길 수 있게 됐다. 버라이즌, AT&T 등 통신·케이블방송업체 영향력이 커지는 반면 구글, 넷플릭스 등 인터넷·콘텐츠기업은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국내에서도 통신·인터넷업계 간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통신업체들은 매년 급증하는 데이터 트래픽에 맞춰 통신망에 투자하려면 인터넷업체들이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2년 월 2만3000테라바이트(TB) 수준이던 국내 통신 트래픽은 올 1월 25만TB를 넘는 등 5년 만에 10배 이상 증가했다.
반면 인터넷기업들은 망중립성 원칙을 도리어 강화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는 지난 17일 “망중립성 원칙은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의 탄생과 성장을 이끌 기반”이라며 “미국의 망중립성 원칙 폐지 결정은 그간 이뤄온 인터넷기업들의 혁신과 향후 산업을 주도할 스타트업의 의지를 꺾어 인터넷 생태계 전반을 위협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민수 한양대 경영대학 교수와 김현경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전문대학원 교수로부터 망중립성 원칙 폐지에 대한 찬반 의견을 들어봤다.
[찬성] 트래픽 급증에 따른 통신망 확충… 인터넷·콘텐츠 업체도 분담해야
거대 플랫폼 사업자들 '무임승차' 막아야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지난 14일 망중립성 원칙 폐지를 의결했다는 기사가 연일 언론 지면을 달구고 있다. FCC는 지난 정부의 망중립성 정책이 실패했다고 평가하며 그 근거로 △광대역 네트워크 투자 감소 △신규 또는 업그레이드된 광대역 인프라 구축 중단 △인프라 관련 일자리 감소 등을 들었다.
미국 통신·케이블업체가 인터넷 생태계 구축을 위해 총 1조5000억달러를 투자했고 이를 기반으로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성공신화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망중립성이 강화된 2012~2015년 망 투자가 20%(1500억달러) 감소했다는 게 FCC 논리다.
그렇다면 우리 사정은 어떨까. 국내 통신사업자의 투자비 비중은 1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10개국 중 일본에 이어 두 번째며, 주요 10개국 평균(11.5%) 대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를 갖추고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발표하는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지수에서 7년 중 6년간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비롯한 다양한 단말기의 확산과 구글 페이스북 등 플랫폼사업자 서비스의 활성화로 데이터 트래픽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통신사업자의 네트워크 커버리지 확충과 품질 확보를 위한 투자비 역시 급증하고 있지만 수익성 개선으로 연결할 방안이 마땅치 않아 통신사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인터넷산업 전체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ICT 생태계 구성원 간 성장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있다.
구글 페이스북 등 미국의 플랫폼기업들은 콘텐츠 우위를 바탕으로 공격적 경쟁전략을 추구해 글로벌 시장에서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우월적 지위를 바탕으로 지배력을 확장해 국내 ICT 사업의 예속 위기마저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구글 등 해외 사업자들은 국내 법 적용 관련 규제 사각지대에 있어 ‘공정경쟁’을 저해하며 망 대가, 세금 회피 등의 이슈를 확산시키고 있다. 네이버 등 국내 플랫폼사업자도 부가통신사업자라는 이유로 규제 없이 시장에 진입해 시장지배력 남용에 따른 불공정 경쟁 등 폐해를 유발하고 있다. 기존의 방송·통신사업자가 엄격한 법적 규제를 적용받는 것과 비교하면 형평성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ICT 생태계 내에서의 규제 논의가 다양한 플레이어들의 역학관계를 고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통신사업자들에만 국한해 망중립성, 서비스 품질 요건, 시장지배력 남용 등을 감시해 오히려 규제가 강화되고 있는 것은 ICT 생태계 활성화에 문제가 될 수 있다.
향후에는 5세대(5G)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사물인터넷의 확산, 가상·증강현실(VR·AR) 활성화 등 폭발적인 데이터 트래픽 증가가 예상된다. 따라서 통신사의 투자 부담을 덜어주고 동시에 콘텐츠 및 인터넷 기반 서비스 생태계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국내 망중립성 변화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한 시점으로 보인다.
스마트폰용 모바일 플랫폼을 기반으로 형성·발전하는 시장에서는 통신사업자, 인터넷사업자뿐만 아니라 단말기 제조사업자까지 참여하는 새로운 환경이 조성돼 기존에 각 시장의 특성에 따라 발생했던 다양한 공정경쟁 이슈가 복합적으로 생길 수 있다. 2020년이 되면 기존의 망중립성 개념은 더 이상 맞지 않게 될 것이다. 규제 기관의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최근 들어 국회를 중심으로 구글과 같은 글로벌 거대 플랫폼사업자에 대한 규제 필요성과 ICT 생태계 규제체계에 관심을 갖고 논의의 장을 만드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반대] 트래픽 비용 부담여력 없는 사업자… 혁신적 서비스 시도조차 어려워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지난 14일 망중립성 원칙을 폐지한다고 발표한 이후 국내에 미치는 여파가 심상치 않다. 망을 보유한 통신사업자는 망에 대한 재산권과 투자 유인 보호, 트래픽 관리 및 트래픽 유발 주체의 비용 분담을 요구한다. 반면 플랫폼·콘텐츠를 제공하는 망 이용 사업자는 공정경쟁, 서비스 혁신 및 우수 콘텐츠 개발 유인을 위해 중립적인 트래픽 관리를 요구한다.
한국에서 ‘망중립성 원칙’은 지금까지 반쪽짜리 원칙이었다. 통신사들은 특정 플랫폼기업에 더 많은 트래픽 비용을 부과해왔다. 네이버, 카카오, 아프리카TV 등 국내 업체들은 연간 수백억원 수준의 망 사용료를 지급하고 있다. 또한 SK텔레콤은 자사가 지분을 50% 이상 가지고 있는 SK플래닛 11번가에 데이터 과금 없이 접속할 수 있도록 한 바 있다. 지금껏 트래픽 사용료를 국내에 지급하지 않은 구글 유튜브 등 국외 사업자와의 형평성은 차치하고라도 트래픽 비용을 부담할 여력이 없는 사업자는 혁신적 서비스를 시도하기조차 곤란하다.
백 보 양보해 그나마 있는 반쪽짜리 망중립성 원칙마저 폐지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외국 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익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우선 망을 제공하는 서비스의 성격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전기·가스·통신·방송 등의 산업은 국민의 일상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역무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어 공공서비스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돼 왔다. 따라서 망을 제공하는 서비스는 국가가 제공해야 하는 공공서비스로 오랫동안 국영기업 또는 공기업 형태로 운영됐다. 민영화 과정을 거친 후에도 정부가 소수 사업자에만 진입을 허용해 일정 부분 독점을 보장해 주는 자연독점사업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미 소비자는 데이터 전송에 필요한 사용료를 충분히 지급하고 있다. 데이터 사용량 증가는 망을 제공하는 통신사의 수익 증대를 의미한다. 만약 네트워크 사용량이 100%에 달했다면 이는 생산량을 초과한 수요가 발생한 것이므로 통신사가 엄청난 매출을 올렸음을 의미한다. 국민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이유는 망 자체를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망을 통해 제공되는 게임, 동영상 등의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즉 콘텐츠나 플랫폼서비스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용자는 통신사에 망 사용료를 지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망 사용료를 받기 위해서는 혁신적이고 우수한 플랫폼과 콘텐츠가 필수다. 특히 국내 플랫폼을 통해 제공되는 데이터·콘텐츠의 이용자가 몰려 한국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데이터가 많아지면, 오히려 외국 통신사가 한국 통신사에 망 사용료를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우수한 콘텐츠와 플랫폼 사용으로 인한 트래픽 증가는 망을 제공하는 사업자에 더 많은 부가가치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와 자동차 제조사, 그리고 운전자 관계를 생각해보자. 고속도로의 운전자는 이미 통행료라는 고속도로 사용료와 자동차세를 납부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중 현대자동차 혹은 쌍용차가 많다고 해서 이들 자동차 제조사에 도로 사용료를 자동차 수만큼 별도로 납부하라고 하지 않는다. 도로공사가 자동차를 직접 만들어 전용라인만 다닐 수 있도록 특혜를 주지도 않는다. 만약 도로공사가 이런 조치를 취한다면 자동차 제조사는 자동차 생산을 줄이고 결국 혁신적 기술 개발은 지연된다. 자동차 생산이 저하되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숫자도 줄어들 것이다. 하물며 이런 비용이 부담스러운 신생 자동차 회사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자동차가 달리지 않는 고속도로를 상상할 수 없듯이 플랫폼과 콘텐츠 없는 망은 존재 가치가 없다.
김태훈 기자 tae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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