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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설사엔 '설사약'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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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호 기자 ] 요즘은 임대(돈을 받고 자기 물건을 남에게 빌려줌)와 임차(돈을 내고 남의 물건을 빌려 씀)를 구별 못하는 경우도 잦다. 사무실을 월세로 빌려 쓰는 사람이 "사무실을 임대해 쓰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북한의 감염병 실태가 알려져 화제가 됐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넘어 귀순한 북한 병사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일부 언론이 이를 보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5세 미만 아동의 사망 원인 중 설사가 20% 가까이 차지한다는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설사병은 만연한데 치료약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사약 잘못 먹으면 더 나와

설사(泄瀉)가 심하면 그것을 멎게 하기 위해 약을 먹어야 한다. 그것을 ‘설사약’이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게 하나 생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설사약은 설사를 멎게 하는 약일까, 설사를 나오게 하는 약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두 가지로 나온다. 우선 설사가 날 때 이를 멎게 하기 위해 먹는 약이다. 다른 말로 ‘지사제(止瀉劑)’라고도 한다. 그런데 반대로 일부러 설사를 나오게 해야 할 때가 있다. 대장내시경 등 의료적 필요에 따라 장을 비우기 위해, 또는 변비로 고생할 때 등이다. 이때 먹는 것도 설사약이다. 이를 ‘하제(下劑)’라고도 한다. 그러니 설사가 나올 때는 설명을 잘 해야 한다. 자칫 엉뚱한 설사약을 먹으면 오히려 더 심해진다. 이런 헷갈림을 방지하기 위해 설사약(설사를 멎게 하는 약)과 설사제(설사를 나오게 하는 약)를 구별해 쓰자는 주장도 일각에서 있다. 변비약이 변비에 먹는 약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듯하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우리말이 안고 있는 모호성, 중의성 때문이다. 말은 명쾌하고 논리적으로 써야 한다. 말을 두루뭉술하게 쓰면 사고력도 따라서 대충대충으로 바뀌어간다.

우리말에서 모호한 표현 없애야

‘대출’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우리가 익히 알듯 대출은 돈이나 물건 등을 빌려주는 것을 말한다. 1991년 나온 우리말큰사전(한글학회)을 비롯해 금성판 국어대사전(1991년), 표준국어대사전(1999년, 국립국어원) 등 모든 사전이 그렇게 풀던 말이다. 그런데 이후 표준국어대사전은 인터넷판에서 대출의 풀이를 ‘돈이나 물건 따위를 빌려주거나 빌림’으로 바꿨다. 예전엔 대출(돈이나 물건을 빌려줌)과 차입(돈이나 물건을 빌림)을 구별해 썼으나 이젠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된 셈이다. 대출자, 대출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임대(돈을 받고 자기 물건을 남에게 빌려줌)와 임차(돈을 내고 남의 물건을 빌려 씀)를 구별 못하는 경우도 잦다. 사무실을 월세로 빌려 쓰는 사람이 “사무실을 임대해 쓰고 있다”고 말한다. 임대는 주인이 하는 것인데….

‘지명자’도 곤혹스럽다. 지명은 ‘여러 사람 가운데 누구를 지정해 가리킴’을 뜻한다. 지명자는 당연히 ‘가리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전의 지명자는 ‘여러 사람 가운데 누구를 지정해 가리키는 자. 또는 그렇게 지명을 받은 자’이다. ‘지명하는 이’와 ‘지명받는 이’가 구별되지 않는다. 영어에서는 nominator(지명자)-nominee(피지명자)로 써서 혼동할 염려가 없다. 우리도 접두사 ‘피(被)-’가 있다. 일부 명사 앞에 붙어 ‘그것을 당함’의 뜻을 더하는 말이다. ‘지명자-피지명자’로 구분하면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 말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드물다. 이 말 자체를 어렵게 여긴다. 요즘 ‘상속인(물려받는 사람)-피상속인(물려주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물론 알기 쉽게 순우리말로 풀어 쓴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기왕에 있는 말을 배척할 필요는 없다. 우리말 어휘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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