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4연임 '빨간불'
"재선거 안두렵다" 의지 밝혔지만
내년 봄까지 정치권력 공백 우려
EU 난제 수두룩한데…
유로존 개혁 등 현안 차질 불가피
브렉시트 협상은 더 늦어질 수도
"독일 연정 결렬, 유럽에 나쁜 소식"
[ 오춘호 기자 ]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두 달 동안 공을 들인 연립정부 구성 협상이 결렬되면서 독일이 권력 공백이라는 위기에 빠졌다. 메르켈 총리는 20일(현지시간) 내년 봄 다시 재선거를 치를 수 있다고 언급했다. 연립정부 구성 재협상에 나서기 위해 배수진을 친 것이지만 자칫 선거로 치달을 경우 권력 공백이 길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불확실성은 갖가지 불안을 낳고 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제 개혁이나 난민 및 이민정책,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연합(EU) 정책들이 큰 암초를 만났다는 우려가 나온다.
◆“소수정부보다 재선거 바람직”
메르켈이 이끄는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은 지난 9월 독일 총선 승리 이후 자유민주당, 녹색당과 연정 구성을 논의했지만 실패했다. 난민 문제와 세금, 환경정책 등을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해 협상이 결렬됐다.
메르켈은 이날 공영방송 ARD와의 인터뷰에서 소수정부 체제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이라고 밝혔다. 대신 “재선거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한 길”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방송프로그램에서 “(재선거가)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협상 실패에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질 생각이 없다”고 말해 총리직을 유지할 뜻을 분명히 했다.
재선거가 결정된다면 내년 봄까지 독일은 정부가 구성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독일 내 정책은 물론 EU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협상 무산이 유럽의 안정성을 크게 해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브렉시트 협상 차질 빚을 듯
당장 브렉시트가 큰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영국과 EU는 올초부터 영국의 EU 탈퇴 비용, 상대국 체류민 권리 등을 놓고 여러 번 머리를 맞댔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메르켈 총리는 24일 회동할 예정이지만 브렉시트에 관한 독일 입장이 불분명해지면 협상에 큰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영국 보수당의 브렉시트 찬성자들은 메이 총리에게 “메르켈의 정치적 허약함을 이용해 영국 총리가 EU 탈퇴 비용으로 제시한 수십억파운드 제공 계획을 유예할 것”을 요청했다. 보수당의 반EU파 하원의원인 이언 던칸 스미스도 “독일의 힘이 빠진 기회를 충분히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독일 기업인과 정치인들은 EU를 겨냥, 브렉시트 논의를 당장 중단해 영국에 이민의 자유를 허락하고 자유로운 이동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스 올라프 헹켈 전 독일산업연맹 회장은 “독일은 EU에 가장 중요한 파트너인 영국을 잃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도 유탄 맞나
메르켈과 협력해 유로존 개혁과 EU 개편을 추진해온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입지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메르켈 총리가 힘을 잃으면 마크롱 대통령도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 양국 정상이 유럽을 주도하는 ‘메르크롱 체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마크롱을 반대하는 극우정당과 사회당이 마크롱 끌어내리기를 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연정협상 실패는 마크롱 대통령에게도 나쁜 소식이라고 보도했다.
마크롱이 메르켈 없는 EU를 이끌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영국 일간 익스프레스는 “마크롱이 EU 정책을 이끌면 독일인들이 분노할 것”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독일의 연정협상 결렬 소식에 “프랑스 국익에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언급했다.
할버 제일스트라 네덜란드 외무장관 역시 “유럽에 나쁜 뉴스”라며 “독일 정부가 권한을 갖지 못하면 유럽이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날트 투스크 EU 집행위원회 상임의장도 “유로존 지원금 마련 등 핵심 사안을 내년에 신속히 추진하려면 EU 지도자들이 하루 속히 의견을 모아도 모자랄 긴요한 시점”이라며 독일의 상황을 우려했다.
◆난국 타개할 돌파구 없나
사회민주당 출신인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이번주 모든 정당 대표와 만나 연정 협상 재개를 설득할 계획이다. 그는 이날 메르켈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모든 정당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타협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재선거와 관련해 “재선거를 요구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독일에서 대통령은 실권이 없지만 상징적인 국가원수인 만큼 돌파구가 열릴지 주목된다. EU의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독일의 연정 구성이 늦어지면 EU의 주요 과제 해소 지연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관측한다.
오춘호 선임기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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