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붙은 '인공지능 칩' 개발 경쟁
인텔은 과감한 M&A로 합종연횡… 브로드컴은 부품 공급사업 고수
'특허왕' 퀄컴도 R&D에 열 올려
게임·가상화폐 채굴에 쓰이는 GPU로 성장한 엔비디아
주가 224% 급등… 시총 1260억달러
[ 허란 기자 ] 자율주행자동차, 사물인터넷(IoT) 등 인공지능(AI) 시장을 놓고 반도체 칩 제조업체 간 경쟁이 뜨겁다. PC, 스마트폰에 이어 AI가 거대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반도체 회사들은 AI용 칩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19일(현지시간) AI 칩 빅뱅에 뛰어든 인텔, 퀄컴, 엔비디아, 브로드컴을 ‘4대 천왕’으로 꼽았다.
◆50%씩 성장하는 시장
4대 천왕은 더 이상 칩 제조업체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AI 시대에 맞춰 회사 DNA를 전면 개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스마트폰용 비메모리 반도체 칩(AP)을 석권한 퀄컴은 플랫폼 회사를, PC 시대 제왕이던 인텔은 데이터 회사를 지향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자사의 딥러닝(AI 심화학습)에 최적화한 그래픽처리장치(GPU) 덕분에 ‘AI 칩 선구자’로 통한다.
시장조사 업체 IDC에 따르면 AI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시장은 해마다 50%씩 증가할 전망이다. 지난해 80억달러(약 9조원)이던 세계 AI 시장 규모는 올해 125억달러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2022년에는 1000억달러(약 112조원)가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회사들은 AI 칩 제왕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합종연횡에 나섰다. CB인사이트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 8월까지 상위 17개 반도체회사(기업의 벤처캐피털 포함)가 집행한 인수 및 투자 가운데 IoT(79건), 가상·증강현실(25건), 자율주행·컴퓨터시각 관련 AI(50건) 등 범(汎)AI 분야 투자가 주를 이뤘다.
2015년 이후 칩 분야 인수합병(M&A) 규모는 1500억달러에 달했다. 세계 반도체 칩 4위 업체 브로드컴은 이달 초 사상 최대인 1300억달러를 퀄컴 인수 비용으로 제시해 업계에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3위 업체인 퀄컴은 인수가가 낮다며 퇴짜를 놓은 상태다.
◆각기 다른 쟁탈 전략
경쟁사들이 문어발식 투자로 ‘대어’를 찾는 것과 달리 브로드컴은 부품 공급업체로서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브로드컴은 TV 셋톱박스, 스마트폰, 광대역 통신인프라에 들어가는 모뎀 등을 생산한다.
호크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CEO)는 “주변 사업에 얼쩡거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며 “다만 지속가능한 핵심 제품군이 있다면 원래 주인보다 더 과감하게 투자하는 게 브로드컴의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브로드컴이 퀄컴 인수로 모바일 무선칩 기술을 확보하려는 이유다.
인텔의 접근 방식은 정반대다. 인텔은 스마트워치, 가상현실, 자율주행차 분야에서 과감한 M&A 전략을 쓰고 있다. 인텔은 2015년 이후 15건의 M&A를 완료했다. 인텔캐피털을 통한 투자는 168건으로 업계 최다 규모다.
중앙처리장치(CPU)로 PC 시대 패권을 잡았던 인텔은 스마트폰 AP 주도권을 퀄컴에 뺏긴 이후 데이터 회사로 자리잡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인텔의 데이터센터 부문 매출은 전체(457억달러)의 절반을 차지한다. 인텔은 미국 실리콘밸리 내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자율주행차 AI 칩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알파벳의 자율주행 부문 자회사 웨이모와 오랜 협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3월 자율주행 센서 및 카메라 회사인 이스라엘의 모빌아이를 150억달러에 인수했다.
1993년 설립된 엔비디아의 강점은 CPU와 비슷한 GPU다. GPU는 게임용 칩으로 알려졌으나 이제는 정보를 병렬처리해 가상화폐 채굴, 딥러닝, 자율주행 칩으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CCS인사이트의 제프 블레이버 애널리스트는 “인텔 구글 페이스북 같은 회사가 잠재적 경쟁자지만 현재로선 엔비디아의 AI 칩이 월등하다”고 말했다. 올해 주가가 두 배 오르며 엔비디아 시가총액은 1260억달러로 불어났다. 한때 인텔의 인수 대상 후보였지만 이제는 넘볼 수 없이 커졌다.
퀄컴 주가는 죽을 쑤고 있다. 올 1월 애플과의 반독점 특허소송이 불거지면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퀄컴의 최대 강점은 세계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칩 특허기술과 그에 따른 로열티다. 이 로열티로 연구개발(R&D) 투자에만 470억달러를 쏟아부을 수 있는 게 퀄컴의 힘이다. 퀄컴도 인텔처럼 M&A 전략을 쓴다. 퀄컴벤처스를 통해 2015년 이후 147건의 투자를 집행했다.
◆누가 업계 표준이 될까
AI업계 빅뱅은 이제 시작이다. 모든 기업이 새로운 기회를 노리고 있다. 표준이 될 AI 칩 시장을 잡기 위해서라면 최대 고객이 가장 잔인한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 엔비디아의 자율주행 동맹(폭스바겐, 아우디, 다임러벤츠, 도요타)은 인텔 연합군의 도전을 받고 있다. 전기차업체 테슬라도 AMD와 손잡고 자체 AI 칩 개발에 나섰다. 미국 반도체 업체 마벨테크놀로지는 20일 5세대 무선칩 강자인 캐비움을 60억달러(약 6조5970억원)에 인수하며 인텔, 브로드컴과의 경쟁 격화를 예고했다.
다른 정보기술(IT) 대기업도 AI에 뛰어들고 있다. 애플은 자체 AI 칩인 ‘뉴런 엔진’을 개발 중이다.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은 지난해 영국 칩 설계회사 암(Arm)을 320억달러에 인수하며 경쟁에 가세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