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춘 부국장 hayoung@hankyung.com
현직 고위관료들에게도 이른바 올드보이들의 귀환은 썩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대선배들이 선례를 만든 만큼 십수년 후 갈 자리가 생겨 좋겠다”고 농담을 건네도 시큰둥하다. 하긴 사무관 때 장·차관으로 모신 하늘 같은 선배를 산하 협회장으로 다시 모셔야 하는 게 영 불편할 듯하다. 한 관료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고 한다. “까마득한 후배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왜 협회장 자리를 원하시느냐”고. 그랬더니 돌아온 농반진반 대답이 “10년을 굶었잖아”였다고 한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죽을 둥 살 둥 일해서 차관도 됐고, 장관도 됐다. 퇴직 후에도 할 일이 많을 듯했다. 그러나 웬걸. 정권이 바뀌자 외면당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일했다는 이유였다. 그저 로펌이나 대학 주변을 맴도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기를 10여 년. 드디어 정권이 바뀌었다. 나이와 위상을 감안하면 협회장 자리가 딱이다. 비록 10년도 훨씬 넘는 후배 관료들의 눈총이 따가운 게 거슬리지만 적당히 행세하기는 이만한 자리도 없다.
60대 관피아들의 협회장 선임
순전히 추측이지만, 이런 생각에서 노무현 정부 장·차관들이 각종 협회장 자리를 염두에 두지 않나 싶다. 최근 취임한 김영주 무역협회장과 김용덕 손해보험협회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과 금융감독위원장을 지냈다. 은행연합회장으로 거론되는 김창록 전 산업은행 총재와 윤용로 전 외환은행장, 생명보험협회장으로 얘기되는 양천식 전 수출입은행장도 노무현 정부 때 금융감독원 부원장이나 금감위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또 다른 은행연합회장 후보인 홍재형 전 부총리와 신임 김효석 석유협회장은 당시 여당 의원 출신이다.
이러다 보니 세월호 참사 직후 만들어진 ‘관피아 방지법’의 취지는 퇴색했다. 민간 협회장 자리를 필두로 공기업과 주인 없는 민간기업 최고경영자(CEO) 자리까지 정치적 입김을 등에 업은 사람들로 물갈이될 것이라는 얘기도 공공연하다.
공기업은 정부가 주인이다. 공적인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회사다. 정부 정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CEO가 되는 게 맞다. 정권이 바뀌면 공기업 CEO들이 무더기로 교체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여러 영역에 자리잡아 공유하는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난 정권에서 이런저런 줄을 타고 CEO가 됐던 사람들이 정권 교체 후 알아서 물러나는 게 어쩌면 예의다.
민간기업 CEO까지 흔들어서야
민간 기업은 다르다. 뚜렷한 주인이 없다고 정부가 주인 노릇을 해서는 곤란하다. 올 들어 BNK금융, DGB금융, NH농협금융, KB금융, 우리은행이 검찰이나 경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성세환 전 BNK금융 회장과 이광구 우리은행장은 사퇴했다. 채용비리 등을 문제삼아 전 정권에서 선임된 은행장은 무조건 바꾸고 보자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최근엔 KT와 포스코의 CEO 교체설도 슬금슬금 나온다. 두 회사 CEO 모두 임기가 2년이나 남아 있는데도 그렇다. 얼마 전 무역협회장을 노렸던 인사가 탈락하자 청와대에 강력히 항의했다는 소문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나돌았다. 청와대는 “민간협회장 인선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한 원칙이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청와대가 민간협회장 인선에도 관여하지 않는데 민간기업 CEO 인사에 관여할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소문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10년이나 굶은 사람이 많긴 많은가 보다.
하영춘 부국장 ha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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