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성장, 규제부터 깨라
(1) 한국시장 떠나는 바이오 스타트업
미국, 249달러 유전자 검사로 암 조기 진단
희귀병 4주 만에 진단하는 한국 스타트업
'첩첩규제'에 막혀 미국에서만 서비스 준비
[ 고재연/임락근 기자 ] 2013년 할리우드 배우 앤젤리나 졸리는 유전자 분석업체 미리어드제네틱스 제품을 통해 유전성 유방암 가능성을 확인하는 검사를 했다.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검사 결과 어머니로부터 BRCA1 유전자 변이를 물려받은 것으로 확인되자 그는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며 세계적인 관심은 개인 유전자 분석 시장에 쏠렸다. 미국에선 23앤드미, 컬러지노믹스 등 B2C(기업·소비자 간 거래) 유전자 분석 시장이 급성장했다.
너무 다른 한국과 미국
컬러지노믹스는 암 유전자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유전자 분석업체다. 유방암 난소암 췌장암 위암 자궁암 등 유전성 암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전자를 분석, 상담하는 서비스를 249달러에 의사와 고객에게 제공한다.
검사 방법은 간단하다. 이용자가 자신의 침을 키트(spit kits)에 뱉어 보내면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은 유전자 변이 여부를 알려준다. 현재 엔비디아, SAP, 스냅챗, 비자 등 45개 기업들이 컬러지노믹스의 유전자 검사 분석 서비스를 직원들에게 복리 후생 차원에서 제공하고 있다.
의료비가 비싼 미국에서 유전자 검사 서비스는 예방의학에 초점을 둔 ‘정밀의학(precision medicine)’의 첨병으로 꼽힌다. 컬러지노믹스는 249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유전자 검사의 대중화를 이뤄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기술력을 갖춘 스타트업이 있다. 유전자 진단 전문 기업인 마크로젠에서 분사한 바이오 스타트업 쓰리빌리언이다. 이 회사는 희귀질환 유전자 분석을 전문으로 한다. 키트에 침을 뱉어 보내면 4주 안에 4800여 종의 유전성 희귀질환 유전자 보유 여부를 알 수 있다. 한 기업인 가족의 유전병으로 알려진 샤르코 마리 투스병(CMT)도 확인할 수 있다. 내년에 출시될 제품 가격은 500~1000달러가 될 전망이다.
쓰리빌리언이 희귀질환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진단 방랑’을 막기 위해서다. 의사들이 짧은 시일에 확진을 하지 못하는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평균 5년간 8개의 병원을 전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쓰리빌리언의 제품 출시는 이런 점에서 희귀병 환자들에게 희소식이다. 하지만 이 업체는 국내 서비스 대신 미국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선 겹겹이 쌓인 규제 때문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장 급팽창 지켜만 볼 건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국에선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 따라 개인이 의료기관을 통하지 않고 유전자 검사 서비스를 받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그러다가 관련 업계의 요구로 지난해 6월 체질량 지수, 카페인대사, 혈압, 혈당, 피부노화, 색소침착, 모발 굵기 등 12가지 항목에 대해 DTC(direct-to-consumer) 유전자 검사가 허용됐다. 미국이 암 예방을 위해 유전자 검사를 활용하는 동안 한국은 비만, 탈모 검사 등에 이 첨단 기술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규제가 일부 풀린 뒤에도 유전자 검사 시장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다.
또 다른 걸림돌은 개인정보보호법이다.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려면 방대한 양의 인간 유전체 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에선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개개인의 유전체 정보를 수집해 빅데이터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일부 공공기관과 연구실에서 연구를 목적으로 유전체 데이터를 사용한 뒤 폐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 기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유전체 데이터 등을 취합해 개인정보를 삭제한 뒤 산업용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개인정보 유출 논란, ‘빅 브러더’ 논란 등으로 지지부진하다.
국내 업체들이 각종 규제로 성장하지 못하는 사이 세계 유전자 분석 시장은 급성장했다. 미국에선 유방암 발병환자가 한 해에 2만 명 수준인데 비해 미리어드제네틱스의 제품은 연간 20만 개가 넘게 팔린다. 암 예방을 위한 진단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유전자 분석 비용도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 2007년에는 개인의 유전자를 해독하는 데 약 10만달러(약 1억원)의 비용이 들었지만, 최근에는 1000달러 이하로 떨어졌다. 애플이 1976년에 666달러짜리 컴퓨터를 판매해 컴퓨터의 대중화를 연 것처럼 1000달러는 ‘산업의 대중화’를 알리는 시점이다.
금창원 쓰리빌리언 대표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해외기업들과 제대로 경쟁할 기회를 얻을 수 없다”며 “국내 DTC 유전자 분석시장도 기껏해야 50억원 규모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재연/임락근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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