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석조전, 서양 고전주의 양식 건물
돌담길 따라 산책하기 좋아
[ 양병훈 기자 ] 조선 14대 임금 선조(1552~1608)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란을 갔다. 1년 반 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뒤였다. 선조는 당시 황화방(皇華坊·한성부 서부 9방 중의 하나)에 있는 월산대군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시어소(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로 삼았다. 선조는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했으나 생전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을 재건해 거처를 옮기면서 그동안 머물던 시어소에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붙였다.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다. 1905년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는 ‘을사늑약’이 맺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려 이 사건 때문에 강제 퇴위됐다. 뒤를 이은 순종(1874∼1926)이 황제에 오른 장소가 경운궁 돈덕전이다. 이때 순종은 태황제(太皇帝)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를 올렸다. 덕수궁(德壽宮)이란 이름은 이렇게 생겼다. 덕수는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이다.
덕수궁은 경복궁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한 건물이 모여 있어 산책하기에 좋다. 궁궐 중간에 큰 연못이 있고, 옆으로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건물인 석조전이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석조전은 한옥과 같은 전통 건축물이 아니라 고전주의 양식의 철골 콘크리트 건물이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황궁의 정전(왕이 나와서 조회를 하던 궁전)으로 기획돼 1910년 준공됐다.
대한제국은 서구화·근대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담아 이 건물을 서양식으로 지었다. 현재 석조전 동관은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격조 높은 미술 전시회가 많이 열린다. 덕수궁을 산책할 때 함께 둘러보면 즐거움이 배가 된다. 현재 열리는 전시는 ‘덕수궁 야외프로젝트: 빛·소리·풍경’으로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기념해 지난 1일 개막했다. 대한제국 시기를 모티브로 현대미술 작가 9명이 덕수궁이라는 역사적 공간에 조형적인 접근을 시도한 전시다. 작가들은 수개월간 덕수궁을 출입하며 이곳에 서려 있는 독특한 기운을 예술적인 감수성으로 풀어냈다. 전시는 가을이 저무는 오는 11월26일까지 계속된다.
덕수궁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길은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 중심부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외딴 섬 같은 곳이다. 가을에는 붉은 낙엽이 바닥에 깔리고 각종 문화행사가 열려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정동극장 뒤에 있는 덕수궁 중명전에 가볼 수도 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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