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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포럼] 무죄추정, 우리가 지켜야 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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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처벌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지만
의심만으로 미리 죄인 취급해서는 안돼
인신구속에 보다 신중을 기하는 사회여야

윤성근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길을 걷다가도 언제 불심검문을 받고 끌려갈지 모른다는 공포를 일상적으로 느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잡혀가면 한참을 구속돼 있다가 뒤늦게 소위 ‘영장처리’가 이뤄지기도 했다. 영장은 청구만 하면 기계적으로 나오는 것이니 청구가 조금 늦어도 별 문제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세계인권선언 제1조). 신체의 자유는 본래부터 자유로운 사람의 가장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권리다. 건강한 사회라면 그 구성원 누구라도 함부로 구속당하고 감금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구속이나 감금은 대부분 국가에 의해 행해진다. 사람은 재판을 통해 정해지는 형벌에 의해 감금될 수 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은 유죄의 입증을 담당하고 피고인은 이를 방어한다. 공격과 방어가 대등하게 이뤄지고 법원이 공정하게 심판을 봐 최선의 결론을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검찰은 방대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해서 강력한 의지로 유죄 입증에 임하며, 이런 막강한 국가권력 앞에 개인은 대등하기 어렵다. 피의자 또는 피고인의 실질적 방어권을 보장하는 것은 문명 발전의 척도 중 하나다.

모든 사람은 혹시 어떤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의심받더라도 유죄판결이 확정되기 전에는 무죄로 여겨지고, 이를 전제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 이것을 ‘무죄추정의 원칙’이라고 하며 방어권의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다.

형법상 무죄란 ‘죄를 지었다는 점이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았다(not guilty)’는 정도의 뜻이다. 무죄 추정에서의 무죄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고 여겨진다(presumed innocent)’는 의미여서 형법상 무죄보다 더 강력하다. 누구나 원칙적으로 결백하다고 여겨지므로 수사를 시작하는 것도 법에 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아무나 일단 입건해서 나올 때까지 털어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남들이 혐오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알려져서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족들까지 고통받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사람을 구속하는 것은 신체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 침해의 시작인데 역사적으로 권력자에 의해 남용돼 왔다. 이런 이유로 사람의 구속은 반드시 개별적 심사를 거쳐 독립된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의하도록 돼 있다. 이것을 선거로 선출되지 않는 법관에게 맡긴 이유도 여론이나 정치권력에 좌우되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누구나 무죄로 추정되지만, 유·무죄가 밝혀지기도 전에 도망가 버리거나 증거를 없앨 위험이 있을 때는 예외적으로 구속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유죄라고 믿어져서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구속영장 기각으로 수사에 차질이 불가피하다거나 수사에 급제동이 걸렸다는 식의 상투적, 선정적 언론 보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불구속 수사가 대원칙이며 실제 대부분의 사건에서 불구속 상태로 수사가 훌륭하게 이뤄지고 있다. 더구나 수사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사건 중에서 막상 영장이 기각된 사람이 도망가거나 증거를 없앴다는 후속 보도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설령 영장 기각 후에 그런 일이 몇 번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더 많은 사람을 더 쉽게 구속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과거 사람이 너무 쉽게 구속되는 사회를 경험했으며, 그에 대한 반성으로 이제는 사람의 구속에 더 신중을 기하는 사회로 발전해 온 것이다.

나쁜 놈을 혼내줘야 하는데 구속영장이 기각되는 바람에 정의의 실현이 방해받고 있다는 식의 보도까지 보인다. 하지만 구속은 처벌이 아니다. 이런 생각은 헌법정신에 반하며 비문명적이고 비민주적이다. 범죄를 수사해서 진실을 밝히고 잘못한 행위에 응분의 대가가 돌아가게 하는 것은 정의에 부합한다. 그러나 피의자의 유죄를 너무 확신해서 유죄 판결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의가 좌절된 것이라고 말하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

사람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고, 무죄로 추정되며, 이런 신체의 자유나 무죄로 추정될 권리는 인류가 오랜 투쟁을 통해 획득한 귀중한 것이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이 권리를 지켜야 한다. 인권문제에서 남의 일이란 없다.

윤성근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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