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현우 기자 ] ‘아젠다 2010’의 한 축을 이루는 ‘하르츠 개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단행한 각종 개혁조치 중 가장 혁신적이고 과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르츠 개혁은 노동시장 유연화에 초점을 맞춘 노동개혁으로, 당시 입안자였던 페터 하르츠 노동시장현대화위원회 위원장의 이름에서 따왔다. 핵심은 정리해고 요건 완화, 실업수당 삭감, 시간제 일자리 확대로 요약할 수 있다.
◆‘고용 유연화’로 저성장·고실업 해결 모색
개혁안이 발표된 직후 독일 노동계는 “고용의 질을 떨어뜨리고 비정규직을 양산할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하르츠 전 위원장은 “노조 역시 고용 보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노동시장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2000년대 들어 독일 기업들은 경직된 노동시장을 피해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고 있었다. 노조로서도 임금 인상이나 근로시간 축소가 아니라 고용 보장에 최우선을 둬야 하는 상황이었다.
독일 정부는 개혁안에 따라 부당해고 금지규정 적용을 완화했고, 적용 범위도 기존 5인 이상에서 10인 이상 사업장으로 좁혔다. ‘미니 잡’이라 불리는 시간제 고용을 확대했고, 이로 인해 발생한 고용주의 사회부담금은 감면해줬다. 또 장기 실업자를 고용하면 고용주에게 임금을 일부 지원했으며 1인 기업 창업도 독려했다. 퇴직연금보험 수령연령의 상향 조정, 기본 실업급여 지급기간 단축 등을 통해 실업급여 수혜 요건은 강화했다.
이와 함께 실업자를 위한 직업 알선·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실업자들이 정부의 취업 제의 또는 고용훈련 중 하나를 의무적으로 선택하도록 했다. 실업자가 정부의 제안을 계속 거부하면 실업급여가 점차 줄어 전액 삭감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이는 ‘지원하되 일하도록 요구한다’는 사회복지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고통 분담으로 상생 택한 독일 노·사·정
반발하던 노동계는 결국 사측과 고통 분담을 통한 상생의 길을 택했다. 노조는 임금을 동결하고 근로시간 연장을 수락하는 대신 사용자들은 일자리를 보장하기로 합의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독일 정부와 산업계가 단축근무제를 도입해 경기 회복기까지 고용을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부도 단축근무로 인한 임금 감소분을 보전해주고 교육 훈련을 적극 지원했다. 기업은 성장과 고용 안정을 도모하고, 노조는 경영 안정에 대승적으로 협조하고, 정부는 적극적인 측면 지원을 통해 공생하는 노·사·정 문화를 구축했다는 평가다.
하르츠 개혁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성향이 다른 두 정권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일관성 있게 노동개혁을 추진해 성공했다는 점에서다. 이 개혁안은 진보 성향 사회민주당 소속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집권하던 2003년 발표됐다. 유권자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정책이 인기가 좋을 리 없었다. 슈뢰더 총리는 2005년 총선에서 대패해 조기 퇴진하는 정치적 불명예를 맛봤다. 이때 정권을 넘겨받은 사람이 지금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다. 중도우파 성향 기독교민주당 소속인 메르켈 총리는 정권 교체의 단초가 된 하르츠 개혁만큼은 계속 추진했다. 경제를 살리려면 노동개혁 이외 대안은 없다고 판단하고 대연정을 통해 사회민주당과 손잡았다.
◆씨 뿌린 슈뢰더, 열매 맺은 메르켈
개혁의 성과는 2005년께 나타나기 시작해 2006년부터 경제지표가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유럽의 병자’라고 조롱받던 독일 경제는 요즘 ‘유럽의 우등생’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순항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오늘날 독일이 유럽의 리더로 떠오른 것은 슈뢰더의 용기 있고 과감한 개혁 덕분”이라고 전임 총리에게 공을 돌리기도 했다. 메르켈 총리는 법정 최저임금제 도입, 파견규제 강화 등의 후속조치를 통해 하르츠 개혁을 꾸준히 진화시키고 있다.
한국은 한때 하르츠 개혁을 모델로 삼아 노동개혁을 시도한 적이 있지만 야당과 노동계의 반발을 넘지 못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개혁을 추진했던 정치인은 선거에서 패할지 모르지만 리더라면 시대의 과제를 피하지 않아야 한다”며 한국을 향해 뼈 있는 조언을 남겼다.
◆NIE 포인트
독일을 포함한 주요 선진국의 최근 경제지표 흐름을 알아보자. 한국 경제가 직면한 상황에 적합한 노동개혁의 방향은 무엇인지 토론해보자.
임현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tard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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