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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예타'하느라 R&D 투자 실기(失期)해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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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R&D 타당성 조사에만 3년
기술선점 위한 발빠른 투자 못해
과기기본법 개정안 등 통과시켜야"

김승조 < 서울대 명예교수·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 >



7, 8년 전쯤 일본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일본 모 대학의 부총장과 저녁자리를 함께 했는데 삼성전자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는 삼성전자가 일본 전자회사들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서던 시점이었다. 삼성 이야기에 점잖던 그 분이 갑자기 흥분했는데 말의 요지는 자금, 기술, 조직이 모두 탄탄한 소니가 삼성에 뒤처진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짧은 지식으로 “삼성의 강점은 빠른 결정에 의한 경영이 아닐까 한다. 일본의 화(和) 문화에 의한 경영이 70년대, 80년대까지는 세계의 부러움을 사는 발전을 가져왔지만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21세기에는 좌고우면하면서 결정에 너무 시간을 끌면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최근 기술의 발전 속도가 더욱 가속화되고 기술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기술 선점을 통해 시장지배력을 확보하려는 국가 간 경쟁 역시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초고속 기술 변화시대에 대응해 해외 주요국의 글로벌 기업들은 물론 각국 정부도 선제적으로 유망기술 개발을 위한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이에 따른 국가연구개발(R&D) 투자에 골몰하고 있다. 일본 역시 2014년 자율주행차에 대한 개발계획을 발표한 뒤 이듬해부터 매년 30억엔 규모의 투자를 할 만큼 순발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세계 1위국이 됐음에도 여전히 R&D를 통제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경제성만을 따져 투자가 이뤄지는 제도와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R&D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500억원 이상 규모의 신규 R&D사업을 추진하려면 예타를 받아야 하는데, 예타 신청부터 예산이 반영되기까지 최소 3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자율주행자동차,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 도래로 각광받고 있는 분야의 기술 발전 속도를 감안할 때 실기(失期)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 재정효율화에 치중하다보니 중장기적 투자가 필요한 창의적 기초연구는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예타를 통과하기 쉽지 않다. 재정당국이 시장 확대, 생산비용 저감 등 직접적인 경제적 효과만을 편익으로 인정하고 지식 창출·확산 등 간접적인 효과는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성 분석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가 어렵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R&D사업을 추진하려는 부처에서는 예타 통과를 위해 당초 계획에서 경제성과 관련이 적은 순수 R&D 내역을 감액해 경제적 효과를 높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과학기술계에서는 이런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왔으나, 재정당국에서는 예산낭비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제도개선에 소극적이었다. 이번에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R&D사업에 대해서는 예타 권한을 과학기술 총괄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부여한다는 정부조직 개편방안이 발표됐다. 이와 연계해 지난 6월9일 정부조직법 개정안과 함께 부수법안으로 국가재정법 개정안과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돼 있다.

그러나 지난 7월20일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통과됐으나 국가재정법 개정안과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돼 있다. 이전 정부의 과학기술 총괄부처가 기능부족으로 제대로 역할을 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또다시 R&D 시스템을 선도형으로 전환할 기회를 놓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4차 산업혁명의 도래 등 기술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지금은 한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은 물론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결정적인 시기다. 중국 등 신흥국은 무서운 속도로 우리나라를 추월하고 있다. 유망기술 투자를 망설이다 보면 일본 거대기업의 몰락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김승조 < 서울대 명예교수·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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