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오른팔' 배넌 경질
트럼프 집권 8개월 만에 방향전환 신호탄
미국 위협하는 북핵 문제는 강경 대응 이어질 듯
통상정책 온건파 주도…한·미FTA 재협상 청신호
[ 워싱턴=박수진 기자 ]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트럼피즘(Trumpism)’의 설계자인 스티븐 배넌 미 백악관 수석전략가의 경질은 집권 8개월째를 맞은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대내외 정책이 ‘궤도 수정’에 들어갔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 행정부 내 권력구도 변화와 함께 한반도 관련 외교·안보 및 통상정책에도 적잖은 변화가 예상된다.
◆반이민 행정명령 사태 뒤 세 잃어
배넌은 자타가 공인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승리 ‘일등 공신’이다. 지난해 8월 트럼프 대선캠프가 붕괴 직전일 때 캠프 최고경영자(CEO)로 합류해 3개월 만에 전세를 뒤엎는 대(大)역전극을 만들어냈다. 그는 백악관 권력서열 1위인 비서실장과 동급인 ‘수석 전략가’ 타이틀을 받고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국제분쟁 불개입(고립주의), 반(反)이민정책, 강경한 통상정책, 정치개혁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미국 우선주의 공약을 정책화하는 데 집중했다. 대통령 취임연설을 작성하고, 국가안보회의(NSC)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과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선언 등 대부분 이슈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관철시켰다.
한때 ‘진짜 대통령’으로 불리던 배넌의 위세가 꺾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주도한 이슬람 입국금지 행정명령이 여론과 사법부의 반대에 부딪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다.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이자 정치적 라이벌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의 견제가 시작됐다. 그는 지난 4월 NSC 상임위원직을 박탈당했고, 그 후 일체의 대외접촉을 피하는 은둔상태에 들어갔다.
◆NYT “개입·국제주의자들의 승리”
그런 그가 4개월 만에 자신과 성향이 다른 진보성향 매체를 골라 인터뷰를 자처하고 “북핵 군사옵션은 없다”는 등의 폭탄 발언을 한 것은 이미 자신의 거취에 감을 잡고 작심발언한 것으로 풀이된다. 배넌이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발생한 유혈사태 때 트럼프 대통령에게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너무 몰아붙이지 마라”고 조언한 사실이 알려져 야당의 포화를 받게 된 것도 경질 결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NYT)는 “배넌의 경질은 트럼프 행정부 내 국제주의자들과 개입주의자들의 승리”라고 해석했다. 배넌은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철저한 고립주의 원칙으로 시리아 등에서 군사개입을 주장하는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과 자주 충돌했다. 그는 한반도 문제에서도 군사적 개입 시 인명 피해와 함께 단기간에 2조달러(약 2280조원)의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될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배넌은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와 방위비 문제 등에서는 한국의 분담 확대를 주장해 한·미 동맹을 강조하는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과 각을 세웠다.
◆美통상정책, 온건파에 힘 실릴 듯
그는 통상 분야에서는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으로 대표되는 자유무역 성향의 골드만삭스 출신 ‘국제주의자’들과 경쟁했다. 콘 위원장은 지난 16일 배넌이 인터뷰에서 “콘(위원장)과 재무장관, 그리고 골드만삭스 로비스트들과 매일 싸우고 있다”며 자신을 공격하자 사임설을 흘려 배넌을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워싱턴 외교소식통은 “배넌의 퇴출로 군사개입을 불사하는 새로운 외교안보팀에 큰 힘이 실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8일 캠프데이비드에서 안보팀과 아프가니스탄 추가파병 문제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반도 정책에서도 당분간 중국과 북한에 대한 최고의 압박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통상 분야에서는 배넌의 퇴출로 급속히 온건파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커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 등에서 무리한 요구가 줄어들 수 있다는 관측이다.
한편 배넌은 보수매체인 ‘위클리스탠더드’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싸워 쟁취한 트럼프 대통령직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자신의 경질로 “트럼프 행정부가 훨씬 더 평범하게 될 것”이라며 “경제 민족주의나 이민과 같은 이슈를 추진하는 데 대통령은 훨씬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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