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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가족도, 친구도…문혁(文革)이란 이름 아래 모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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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지음 /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595쪽 / 2만5000원



[ 서화동 기자 ]
제법 두툼한 책을 다 읽고 나니 인간의 이성에 대해 회의가 든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운 국가적 캠페인이 이토록 잔인한 폭력과 살상, 약탈과 유린, 파괴와 말살의 대행진이었다니…. 더구나 그 이면에는 스스로를 우상화하고 정적을 제거하려는 늙은 독재자의 술수가 깔려 있었다니 끝모를 탐욕과 광기 앞에 이성은 이토록 무력한가 싶다.

프랑크 디쾨터 홍콩대 석좌교수가 쓴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毛澤東)이 말년에 전개했던 문화대혁명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마오 시대를 새롭게 분석한 ‘인민 3부작’의 세 번째 책이다. 공산당의 국공 내전 승리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다룬 해방의 비극,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라고 평가받는 대약진 운동 시기를 다룬 마오의 대기근에 이어 출간됐다. 책의 부제로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976’이라고 붙인 이유다.

저자는 최근 중국의 각 성 기록보관소가 처음 공개한 수백 건의 문서와 연구 성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인터뷰와 회고록 등을 폭넓게 동원해 문혁 기간의 처절했던 삶을 복원하고 고발한다. 중국이 공개한 자료들은 홍위병들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자세한 피해 상황, 정치적 숙청을 둘러싼 역학관계와 통계, 농촌과 공장 및 작업장 실태조사, 경찰의 암시장 보고서, 농민들이 쓴 탄원서 등 다양하다.

저자에 따르면 마오는 소련을 자본주의 재건의 길로 이끈 니키타 흐루시초프 같은 현대 수정주의자들을 부정하고 사회주의 진영의 역사에서 중심축이 되려고 했다. 문혁은 이를 위한 마오의 두 번째 시도였다. 첫 시도는 1958년의 대약진운동이었다. 농민들을 인민공사라는 거대한 집단농장에 배속시켜 소련을 앞지르려 했던 대약진운동은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실험으로 끝났다.

위기에 직면한 마오는 문혁을 내세웠다.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려면 개인주의적인 사고부터 민간 시장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문화의 모든 흔적을 영원히 제거해야 한다며 이를 문화대혁명이라고 불렀다.

1966년 6월1일 인민일보에 실린 선동적인 논설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가 혁명의 시작이었다. 마오는 당 외부의 급진적인 학생들을 동원해 이들에게 ‘계급의 적’ ‘주자파’ ‘수정주의자’ 등의 낙인을 씌워 숙청 작업을 벌였다. 학생들은 타인의 영향을 쉽게 받는 데다 조종하기 쉬웠다. 마오는 ‘저항은 정당한 행위’라며 이들을 부추겼다.

비극은 각급 학교에서부터 시작됐다. 공작대에 의해 표적으로 지목된 교사와 학생에게 홍위병은 원래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 씌우는 원추형의 종이모자인 ‘바보모자’를 쓰고 다니게 했다. 어떤 이는 목에 ‘자본주의의 앞잡이’ ‘흑방분자’ 등의 죄목을 적은 팻말을 달고 다녀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보모자는 길고 무거워졌고, 팻말도 커졌다. 머지않아 구타가 시작됐고 희생자가 줄을 이었다. 베이징 제3여자중학교에서는 교장이 맞아죽었고, 학생 주임은 스스로 목을 맸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 교장을 세워놓고 홍위병들이 끓는 물을 들이붓기도 했다. 교사들에게 못이나 배설물을 삼키게 하고 서로 뺨을 때리게 했다.

부르주아 지식인뿐만 아니라 전족을 한 노부인, 거리의 행상조차 자본주의의 잔재로 지목됐다. 곤봉에 맞아 죽은 사람, 작두칼에 베이거나 철사줄에 목이 졸려 죽은 사람도 있었다. 여덟 살짜리 소녀와 할머니는 생매장을 당했다. 일가족이 몰살당한 경우도 허다했다. 사찰과 교회, 역사적 기념물, 상점, 문화재 등 과거와 관련된 모든 것은 파괴됐다.

홍위병 시대가 막을 내리자 대오정화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스파이, 반역자, 변절자 등을 색출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직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학생들은 농촌으로 보내졌다. 교사, 당 간부, 학생뿐만 아니라 보통의 인민들까지 수백만 명이 ‘농촌 재교육’을 빌미로 숙청됐다. 저자는 “문혁 10년 동안 150만~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끝없이 계속된 비난과 허위 자백, 투쟁대회, 박해운동 등으로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의 삶이 파괴됐다”고 했다. 문혁에 대한 평가는 마오의 마지막 장면이 말해준다. 1976년 그가 죽자 사람들은 슬퍼하는 기색도 없었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으며, 단지 안도감만 존재했다는 것이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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