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태 정치부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8주기 추도식에 섰다. 그는 지난 4월22일 부산선거유세에서 3만여 운집한 시민을 향해 이렇게 약속했다.
“선거 보름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때 보고드리겠다. 당신이 못다 이룬 지역주의 극복의 꿈,당신의 친구 문재인이 해냈다. 이렇게 말씀드리겠다”
서거 8주기 행사를 하루 앞둔 22일 문 대통령의 예기치 않은 하루 휴가도 ‘운명’과도 같았던 노 전 대통령과의 생사를 뛰어넘은 질긴 인연을 되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노 전 대통령이 서거할때까지 28년 세월을 동업자와 정치적 동지로 지냈던 둘은 두 차례 보수정권을 거쳐 전·현직 대통령신분으로 운명처럼 다시 마주했다.
문 대통령은 1982년 사법연수원 수료후 판사임용에 실패한후 노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해 노동 인권변호사의 길을 함께 걸었던 둘은 동업자에서 동지관계로 변해갔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고 말했다.
알려진 것 처럼 문 대통령을 정계로 잡아 끈 이는 노 전 대통령이었다.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출마했을때나 2002년 대선승리후에도 조력자로만 남고 싶어했다. 그런 그에게 노 전 대통령은 민정수석을 맡아 줄 것을 부탁하면서 “당신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고 한다. 1주일 고심끝에 문 대통령은 두가지 조건을 전제로 그 제안을 수락했다. “민정수석으로 끝내겠습니다”,“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요”
하지만 문 대통령이 내건 조건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 통과와 퇴임후 ‘극단적’선택으로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기보다는 둘의 운명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계입문 초기의 문 대통령을 만났던 사람들은 “권력의지라곤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문 대통령의 대선캠프에 두차례 참여했던 한 의원은 2012년과 비교해 “권력의지가 단단해졌다”는 평가를 내린다. 문 대통령이 재수를 감수하면서 대권도전에 나선 것이나 권력의지가 충만해 진 것은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숙제에 대한 ‘강박’에서 비롯됐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467쪽에 달하는 저서 ‘운명’에서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 말로 운명이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저서는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끝을 맺는다.
10여일을 갓 넘긴 문 대통령의 국정행보에서 노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평가가 나온다. 검찰 개혁, 서로 다른 가치관을 뛰어넘은 탕평 인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 해소 등 ‘전광석화’ 같은 업무지시는 ‘사람 사는 세상’을 추구했던 노 전 대통령이 가다가 멈췄던 길이다. 문 대통령은 파격적이고 양성평등을 지향했던 노무현 정부의 첫 조각인선을 그대로 ‘벤치마킹’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저서에서 당시 민정수석 자격으로 강금실 민변부회장을 장관후보로 추천했지만 법무부장관으로 지명하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법무부장관보다 환경부나 보건복지부 여성부 교육부쪽을 맡기는게 덜 부담스럽지 않겠다”는 제안에 “남성 전유물처럼 생각돼왔던 자리에까지 여성을 과감하게 발탁해야 한다”고 밀어부쳤다.
"우리 사회에서 어느 여성의 능력이 남성과 비슷하다면, 그 여성은 훨썬 더 능력이 있다”는 노 전 대통령의 진취적 여성관은 문 대통령에게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문 대통령이 최근 강경화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를 외교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것은 ‘노무현식’파격인사의 데쟈뷰다.강 후보자는 비(非)외무고시 출신인 데다 인사청문회를 통과하면 70년 외교부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이 된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문 대통령을 ‘친구’로 표현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부산에서 열린 한 대선 유세현장에서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노 전 대통령이 여섯살 많고, 고시도 5년위면 법조계에선 대선배로 통한다. 둘은 상호간 존칭을 쓰며 서로 깎듯하게 지냈다. 흔히 부산 사내들처럼 ‘형님 동생’하며 인위적으로 거리감을 좁힐려는 시도조차 없었지만 둘은 상호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상하관계를 초월한 친구사이가 될 수 있었다고 문 대통령은 회고한다.
문 대통령은 23일 추도식 인사말을 통해 “오늘 이 추도식에 대통령으로 참석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며 “노무현 대통령님도 오늘만큼은, 여기 어디에선가 우리들 가운데 숨어서,“야, 기분 좋다!” 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노무현의 꿈은 깨어있는 시민의 힘으로 부활했다”며 “이제 우리는 다시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이 그립다. 보고 싶다”면서 “이제 저는 임기동안 대통령님을 가슴에만 간직한 채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이제 당신을 온전히 국민께 돌려드린다”며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임무를 다한 다음 다시 찾아뵙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8주기 추도식을 전후로 2명의 전직 대통령을 둘러싼 2가지 이슈가 우연의 일치인듯 불거져 나와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3일 뇌물수뢰및 강요 등 혐의로 형사재판대에 섰다. 전날엔 실체적 진실과 상관없이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온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핵심사업인 4대강 사업이 다시 정책감사의 심판대에 올랐다. 문 대통령이 휴가중 4대강 사업에 대한 정책감사를 지시했다. 이 두 사건이 과거 정권에 대한 ‘적폐청산’을 강조해온 향후 문 대통령의 행보와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끝)/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