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중 자전거에 꽂힌 미국 청년
이탈리아 업체 부품 수입해 조립
연 매출 1조 '자전거의 벤츠' 일궈
단돈 170만원으로 사업 시작
트레일러에서 살며 조립 제작
제품 싣고 판매점 돌아다녀
대량 생산 MTB '스텀점퍼' 열풍
선수들과 협업…프로팀 4곳 후원
초기모델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전시
세계 챔피언이 타는 자전거 입소문
마니아 몰리며 고급 자전거 대명사로
1000만원대 브랜드 '에스웍스' 불티
[ 박상익 기자 ]
1974년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대를 갓 졸업한 청년 마이크 신야드는 와이셔츠와 넥타이 차림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좋은 직장을 찾는 대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폭스바겐 버스를 판 돈으로 유럽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미래를 봤다. 바로 자전거였다. 이탈리아 유명 자전거 브랜드인 치넬리가 제작한 자전거부품을 미국으로 들여오기로 마음먹었다. 캘리포니아 모건힐에 자전거부품 수입상을 차렸다. 세계적인 자전거 브랜드 ‘스페셜라이즈드(Specialized)’의 시작이었다. 회사 이름은 소비자에게 특별하고 좋은 것을 제공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스페셜라이즈드는 트렉, 자이언트 등과 함께 세계 3대 자전거 브랜드로 꼽힌다. 현재 연 매출은 1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일반인들이 타는 산악용(MTB), 하이브리드, 로드사이클부터 세계 최고의 자전거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에 참가하는 프로 선수용까지 제작한다. 스페셜라이즈드의 최고급 모델은 1000만원을 훌쩍 넘어 동호인 사이에선 ‘자전거계의 벤츠’로 통한다.
트레일러 생활하며 자전거로 220㎞ 달려
신야드 회장은 유럽에서 뛰어난 자전거 제작 수준을 확인했다. 당시 미국에서도 더 좋은 자전거에 대한 욕구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기대만큼의 자전거와 부품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 자전거계의 대부인 치넬리를 만나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여행 자금을 털어 값비싼 정장을 샀다. 치넬리로부터 부품을 수입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그는 남은 돈 1500달러(약 170만원)로 첫 주문대금을 치르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자신의 가장 비싼 재산인 자동차를 팔았기에 신야드는 이탈리아에서 제품이 들어오면 맨몸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건힐에서 샌프란시스코 공항 세관까지 자전거로 왕복 220㎞를 달려야 했다”며 “물건을 받아오면 직접 만든 트레일러에 제품을 싣고 자전거 판매점을 돌아다녔다”고 회상했다. 그는 25㎡ 크기의 트레일러에 살며 그 아래에 제품을 보관하는 힘든 시절을 견뎠다. 사업 초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밥을 굶어가며 거래처를 확보했고 당시 업계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선입금 주문 방식을 관철시켰다.
최초의 대량생산 MTB로 미국 휩쓸어
자체 브랜드 타이어를 만들며 회사를 키운 신야드는 1979년 첫 자전거인 ‘알레’를 선보였다. 자전거 강국 중 한 곳인 일본에 주문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2년 뒤 스페셜라이즈드는 회사뿐만 아니라 세계 자전거 역사에 남을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당시 MTB는 경력 있는 제작자들이 수제작을 했기 때문에 값이 수천달러에 달했다. 세계 각국에서 싸고 좋은 부품을 조달해 일본에서 제작하는 방식을 택한 신야드는 1981년 세계 최초의 대량생산형 MTB인 ‘스텀점퍼’를 세상에 내놨다. 750달러라는 획기적인 값에 성능까지 뛰어난 스텀점퍼는 단숨에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았다. 스텀점퍼는 개량을 거쳐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소비자에게 사랑받고 있다. 초기 모델은 미국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영구소장품이 됐다. 신야드는 “사람들은 스텀점퍼에 놀라울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다”며 “이는 단순히 새로운 자전거가 나온 것이 아닌 새로운 생활방식이 만들어졌다는 증거였다”고 말했다.
프로가 사랑하는 자전거…유명 대회 휩쓸다
스페셜라이즈드는 제품 생산 초기부터 프로 선수와의 협업을 추구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탈리아의 전설적 선수 마리오 치폴리니를 비롯해 파비앙 칸첼라라, 알베르토 콘타도르, 앤디 쉴렉, 마크 카벤디시 같은 유명 선수들이 스페셜라이즈드 자전거를 타고 세계 대회를 휩쓸었다. 스페셜라이즈드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에틱스 퀵스텝(벨기에), 아스타나(카자흐스탄), 틴코프(러시아), 보엘스 돌만(네덜란드·여성) 등 프로 사이클링 최고 등급 팀 네 곳을 후원한 유일한 회사였다. 피터 사간, 아말리에 디데릭센 등 남녀 로드사이클 세계 챔피언도 스페셜라이즈드 자전거를 탄다.
MTB와 로드사이클을 가리지 않고 각종 대회에서 성능을 인정받자 고급 자전거를 원하는 소비자는 자연스레 스페셜라이즈드 매장으로 몰려들었다. 여기에 자전거 문화를 만든다는 매장 콘셉트까지 더해져 고급 자전거의 지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자전거 전문지 벨로페이퍼의 김석현 편집장은 “스페셜라이즈드보다 더 비싼 자전거는 많지만 회사가 마케팅을 가장 활발하게 한 덕에 고급 자전거의 대명사가 됐다”며 “상품 구매부터 피팅(자전거 사이즈 미세 조정), 안전한 자전거 타기 교육 등 사이클 프로그램 분야에서 독보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전거계의 벤츠로 고급화 전략 성공
스페셜라이즈드 고급 자전거에는 상호인 ‘Specialized’ 대신 ‘에스웍스(S-WORKS)’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록히드마틴의 고급 연구 및 설계 부서인 스컹크 웍스(skunk works)가 떠오르는 이 이름은 스페셜라이즈드 자전거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이고 레이싱이라는 목적에 가장 부합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회사 대표 로드사이클 중 하나인 ‘타막’은 등급에 따라 가격이 210만~690만원 정도지만 에스웍스 타막이라는 이름을 다는 순간 1000만원대로 뛴다. 그래도 에스웍스를 소유하고 싶은 자전거 동호인들은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현대자동차와 일본 도요타자동차가 각각 ‘제네시스’와 ‘렉서스’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1950년생으로 곧 일흔을 바라보는 신야드는 지금도 매일 자전거를 타며 제품 개발에 영감을 얻고 있다. “그동안 스페셜라이즈드는 자전거 혁신을 이끌었습니다. 이제는 더는 혁신이 일어나기 힘들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천만에요. 우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입니다. 혁신 아니면 죽음이 우리의 좌우명이니까요.”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