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창민 / 유승호 / 김순신 기자 ]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이달 안에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통해서라도 상법 개정안을 밀어붙일 기세다. 대기업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회사를 좌지우지하는 지배구조를 바꿔야만 정경 유착 관행을 없애고 소액주주도 보호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재계는 ‘상법 포비아’에 빠졌다. 대주주 의결권을 제한하는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외국 투기자본에 기업들의 안방을 내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1) 감사위원 분리 선임…'의결권 3%로 제한'
"대주주의 감사 선임 막아야" vs "투기자본이 감사 장악"
가장 첨예하게 의견이 엇갈리는 대목은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다. 대주주가 뽑은 이사 중에서 감사위원을 선출하지 않고 대주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갖도록 감사위원을 별도로 선임하는 제도로, 대주주는 많은 지분을 가졌더라도 의결권이 3%로 제한된다. 민주당 관계자는 “현행 상법엔 대주주가 이사들을 일괄 선임한 뒤 그 중 감사위원을 뽑도록 돼 있고, 감사위원을 선출할 때만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한다”며 “이미 이사를 선임하는 과정에서 대주주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감사위원을 따로 뽑고 선출 과정부터 의결권을 제한해야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사회는 통상 7~9명의 이사(감사위원인 이사 포함)로 이뤄진다. 상법상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은 이사 중 3명 이상을 감사위원으로 둬야 한다. 감사위원인 이사는 회사의 업무 및 회계 감독권을 가진다.
재계의 우려는 크다. 지분 쪼개기(3% 이하)를 통해 의결권 제한 규정을 피할 수 있는 외국 투기자본이 대기업 감사위원 자리를 모두 장악할 수 있어서다. 예컨대 현대자동차는 현대모비스(지분 20.8%)와 정몽구 회장(5.2%), 정의선 부회장(2.3%)이 주요 주주인데, 이들은 이사 선임 과정에서 28.3%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감사위원 분리선출제가 적용되면 이들의 의결권은 총 8.3%로 떨어진다. 현대모비스와 정 회장의 의결권이 각각 3%로 제한돼서다. ‘1주 1표’ 원칙이 깨지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외국 헤지펀드 서너 곳이 손을 잡으면 현대차 이사회 아홉 명 중 감사위원 네 명의 자리를 모두 꿰찰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감사위원은 이사도 겸임하므로 외국계 투기자본이 감사위원을 장악하면 무리한 배당이나 자산 매각 등을 요구할 수 있다.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다. 김선정 동국대 법대 교수는 15일 한국경제연구원 주최로 열린 좌담회에서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를 도입한 나라는 세계에 한 곳도 없다”며 “외국에서 입법례를 찾기 힘든 법안을 충분한 토의 없이 채택한다면 한국 상법은 국제적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 집중투표제…이사수만큼 의결권 부여
"소수주주 권리 강화" vs "투기자본 진출 통로 악용"
두 명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주당 새로 뽑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해 한 명에게 몰아줄 수 있는 집중투표제를 놓고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행 상법도 집중투표제를 도입하고 있지만 개별 회사가 정관에 ‘집중투표제를 도입하지 않는다’고 규정하면 이를 시행하지 않아도 된다. 야당은 이를 법으로 의무화해 소수주주 권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수주주가 자신을 대표하는 사람을 이사로 앉히거나, 대주주가 내세운 이사 후보 중 문제가 있는 인물의 선임을 막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기업들은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외국 투기자본이 국내 기업 이사회에 진출하는 통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국 투기자본 지분율이 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최소 비율(1/총 선임이사 수+1)을 넘어서면 ‘몰아주기’ 투표로 무조건 한 명 이상을 원하는 사람으로 뽑을 수 있어서다. 이런 이유로 집중투표제를 법으로 의무화한 나라는 칠레 멕시코 러시아 등 3개국밖에 없다.
재계는 감사위원 분리선출제와 집중투표제가 함께 도입되면 기업 이사회 절반 이상이 외국 투기자본에 넘어가 경영권을 크게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한 헤지펀드인 엘리엇이 2012년 미국 우량기업인 BMC소프트웨어 지분 9%를 취득한 뒤 경영에 개입하며 이사 열 명 중 두 명을 펀드 측 사람으로 바꾼 사례가 대표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한 2015년에 상법 개정안이 적용된 상태였다면, 헤지펀드들에 의해 두 회사의 합병이 무산됐거나 통합 삼성물산이 경영권 위협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최완진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소수주주를 대표하는 이사와 최대주주를 대표하는 이사가 공존하게 돼 이사회 의사결정이 답보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3) 다중대표소송제·전자투표제도
"자회사 위법 행위 막아" vs "불필요한 소송 남발"
다중대표소송제도 야당과 재계의 의견이 엇갈린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모회사의 지분 1% 이상을 가진 주주가 자회사 임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야당은 자회사 임원의 위법 행위로 모회사가 손해를 입었을 때 모회사 주주가 권리를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재계는 주주 간 이해가 상충할 소지가 있고 소송 남용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송종준 충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다중대표소송제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입한 일본도 경영권 및 자회사 주주의 권리 침해를 이유로 100% 자회사에 한해서만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자투표제도 마찬가지다. 야당은 인터넷 투표를 이용해 소수주주의 의결권 행사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계는 전자투표제가 의무화되면 투기자본 등의 악의적 루머 공격 때 투표 쏠림이 나타나 경영권 방어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노동조합이나 우리사주조합 추천 후보를 의무적으로 사외이사로 두는 근로자이사제에 대한 시각차도 크다. 오너의 전횡을 막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노사 갈등 시 이사회가 파행을 겪을 수 있다는 시각도 많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은 “지금 논의되는 대로 상법이 개정되면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경제황폐화’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10대 그룹 임원은 “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보호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집중투표제 등과 같은 상법 개정이 이뤄지면 국내 알짜 기업을 해외 투기자본에 갖다 바치는 꼴”이라고 말했다.
장창민/유승호/김순신 기자 cm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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