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었던 '사랑의 온도탑' 가까스로 100도
검찰·특검 조사받은 10대 그룹, 작년보다 한달 늦게 기부 결정
기업들, 평창올림픽 지원 또 고민
"불우이웃돕기·올림픽 후원 등 금액 할당 반강제 모금 변질"
기업에 손 벌리는 준조세 관행…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나
[ 장창민 / 마지혜 기자 ]
재계엔 암묵적인 ‘공식’이 하나 있다. 연말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다. 통상 삼성그룹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성금을 내면 재계 서열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돈을 내는 식이다. 그런데 이 공식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지난해 말부터 기업들의 성금 납부 시기가 2주에서 한 달 가까이 늦춰졌다. 큰 기업이 먼저 내던 관행도 사라졌다. 대기업 53곳이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씨가 주도한 미르·K스포츠재단에 774억원을 ‘반(半)강제적’으로 출연(기부)한 문제로 촉발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여파 탓이다. 기업들이 특별검사팀 수사까지 받게 되면서 서로 눈치를 보다 ‘지각 성금’을 낸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성금 순서 공식도 깨졌다
통상 삼성그룹이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100을 먼저 내면 뒤이어 현대자동차그룹이 50~60을, SK그룹과 LG그룹이 30~40가량을 낸다. 가끔 전년보다 성금을 늘리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최순실 사태로 이런 관행은 흐트러졌다. 삼성(500억원)과 현대차(250억원), 롯데(70억원), GS(40억원), 한화(30억원) 등 많은 그룹이 지난해 말 예년보다 열흘에서 한 달가량 성금을 늦게 냈다. SK(120억원)와 LG(120억원), 포스코(80억원), 한진(30억원) 등만 전년과 비슷한 시기에 냈다.
성금 순서는 뒤죽박죽이었다. 먼저 내던 삼성과 현대차그룹이 성금 납부 시기를 늦추면서다. 전년보다 성금을 늘린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그룹 순위별 성금 비율만 비슷하게 유지됐다. 10대 그룹 중 현대중공업그룹은 실적 부진으로 2015년과 지난해 2년간 성금을 내지 않았다.
10대 그룹의 한 임원은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에 대한 사회적 비판 여론과 특검 수사 등을 의식해 기부 결정을 내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다”며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과 지속가능경영 등을 감안해 올해도 예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불우이웃 성금만은 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뒤늦게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온도탑 온도 역시 뒤늦게 올라갔다. 지난달 중순까지 17.8도(638억원)로 전년 같은 시기 43.3도(1484억원)보다 훨씬 낮았다. 모금회 관계자는 “지난달 말부터 기업을 중심으로 각계의 기부 독려가 이어지면서 이달 들어 예년 수준을 회복했다”고 설명했다. 24일 기준 사랑의 온도탑 온도는 99.7도(3577억원)다. 조만간 100도(목표액 3588억원)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작년엔 1월31일 100도를 돌파했다.
기부금 놓고 고민 커지는 재계
기업들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내년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 후원 문제 때문이다. 최순실 사태 여파로 기업들이 기부금을 내는 것 자체에 눈치를 보면서 평창올림픽 후원을 미루려는 곳이 적지 않다. 현재까지 확정된 기업 후원금은 8400억원 정도로 전해졌다. 목표 금액(9400억원)에 미치지 못한다. 한 경제단체 임원은 “스포츠사업에 대한 기업 후원이 부정적으로 비치는 분위기여서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긴 부담스러운 상황”이라고 했다.
재계에선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기부금 등 준조세 관련 법과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기부금은 자발적으로 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정권 눈치를 보고 내거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내는 경우가 많아서다. 미르·K스포츠재단을 비롯해 평창동계올림픽 협찬금 등도 ‘자발적’인 것으로 포장됐지만 ‘반강제적’인 성격이 짙다는 시각이 많다.
한 대기업 임원은 “불우이웃 성금이나 평창올림픽 후원금 등은 본연의 취지는 퇴색되고 기업 규모에 따라 금액이 할당되는 반강제 모금으로 변질된 것 같다”며 “기업 여건에 따라 자유롭게 기부할 수 있도록 문화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기회에 기업이 내는 온갖 기부금과 부담금 등 준조세 제도를 대폭 정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장창민/마지혜 기자 cm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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