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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리포트] 동남아 창업의 메카 꿈꾸는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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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제조업 중심 모델로는 한계 인식…공장만 남기고 떠났던 ‘소니 트라우마’


베트남의 향후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좀 더 질문을 구체화해보자. 베트남 정부가 추종하고 싶어하는 발전 모델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쉽게 예단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은 한국을 닮고 싶어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확실히 베트남은 한국이 걸어왔던 길을 따라오고 있다. 저임금에 기초한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제조업 중심의 발전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닮았다.

베트남에 대한 해외 자본의 투자는 대부분 그린필드 투자다. 한국 기업만해도 삼성같은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간에 호치민, 하노이 등 노동력이 풍부한 대도시 인근에 공장을 짓는다. 매달 300달러 정도면 고용할 수 있는 근로자들을 활용해 제품을 생산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들은 세계 각지로 팔려나간다.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로 불리는 개혁·개방을 선언한 이후, 전세계 주요 국가들과 양자간무역협정(FTA)을 맺음으로써 FDI(외국인직접투자)를 늘리는데 주력해왔다.

이 같은 방식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저임금 단순 가공업에서 시작해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 등 첨단 고숙련 제조업으로 이동하기 위해선 몇 가지 행운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우선, 경쟁이 덜했다. 미국과 나란히 ‘선발자’ 지위를 차지한 일본을 빼면, 아시아에서 한국과 경쟁할만한 곳은 대만 정도였다.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넘어간 1980년대를 전후해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나머지 두 곳인 홍콩과 싱가포르는 금융업 중심의 발전전략을 택한 ‘도시 국가’였다. 발전전략이란 측면에서 한국, 대만과 다른 길을 걸었다는 얘기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사실은 1980년대는 글로벌 제조업이 최정점에 달했던 시기라는 점이다. 한국은 ‘3저 호황’이라는 순풍을 타고 거침없이 전세계 수출 시장을 누볐다. 이때만해도 경쟁의 패러다임은 의외로 단순했다. 반도체, 자동차 등 대규모 장치산업이 세계의 부를 창출하는 근원이었다. 반도체 산업만해도 삼성이 반도체와 관련한 일괄생산체제를 갖추자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원조격인 일본을 앞지를 정도로 급성장했다. 쉽게 말해 시험 문제의 출제 범위가 명확했던 시기여서 뒤늦게 공부해도 주경야독으로 열심히하면 얼마든지 추격이 가능했다.

하지만 베트남이 처한 상황은 과거 우리와는 다르다. 가장 큰 장애물은 중국이다. 1980년대까지만해도 사회주의라는 도그마에 갇혀 있던 아시아의 거인은 어느 순간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더니 일약 글로벌 제조업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글로벌밸류체인의 맨 밑단에서부터 이제는 휴대폰, 반도체, 자동차 등 최첨단 산업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기업들이 장악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다. 베트남이 단순 가공업에서 벗어나 첨단 제조업의 ‘선수’로 성장하려면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의 막강한 경쟁자들을 넘어서야 한다.

베트남 정부가 월드뱅크와 공동으로 만든 ‘2035 베트남 보고서’도 이 같은 한계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약 20년 뒤의 미래를 그리며 월드뱅크는 ‘베트남 기업들이 삼성 등 글로벌 기업에 부품을 공급할 수 있는 1·2차 협력업체를 육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삼성과 같은 기업들이 베트남을 떠나기 전에 최대한 그들의 ‘노하우’를 배우라는 얘기인데 ‘삼성이 되라’는 충고가 아니라는 점이 흥미롭다.

제조업 중심의 발전전략이 베트남이 추구해야할 방향인가에 관한 의문은 구글, 애플, 아마존, 알리바바 등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신(新)경제의 도래와도 관련이 있다. 제조업이 세계의 부를 창조하는 과거의 패러다임은 지나고 있다는 얘기다. 독일, 일본, 한국이 제조업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을 부르짖고 있는 마당에 베트남이 여기에 숟가락을 얹는다고해서 콩고물이라도 제대로 얻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역설적으로 베트남은 제조업 중심의 발전전략을 어느 시점에 가선 폐기해야만 글로벌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기회라는 건 테크놀로지와 인구통계학적 변화의 접점에서 발생하는데 중국이 좋은 선례를 보여주고 있다. 모바일의 확산과 이를 통한 구매 욕구, 중산층의 폭발적인 성장이 접점을 이루는 순간에서 대규모 혁신이 발생하는데 중국이 이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바로 알리바바다.

베트남도 중국의 모델을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 베트남 어디를 가도, 심지어 밀림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서도 아이들 손에 대부분 휴대폰이 들려 있다. 테크놀로지의 혁신은 과거엔 상상도 못했을 최첨단 IT 기기를 아주 값싼 가격에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보급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은 한국이 1980년대에 겪었던 그 어떤 변화보다 빠른 혁신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있다.

게다가 베트남은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다. 베트남 인구는 약 9500만여명으로 추산된다. 그 중 약 30% 이상이 20세에서 45세 사이의 젊은층이다. 약 80% 이상이 15세부터 64세 사이의 경제활동인구라고 한다. 베트남 총 인구의 절반 이상이 10대에서 30대라는 얘기다. 실제로 호치민시에서 노인을 찾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이제 막 학생티를 벗은 청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요란하게 다니는 모습이 호치민 도심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여기에 더해, 베트남의 문자해독률은 96%에 달하고, 부모들의 엄청난 교육열 덕분에 젊은층 다수가 영어에 익숙하다. 월드뱅크의 예상에 따르면 2035년이면 베트남 인구의 절반 이상이 중산층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트남의 앞날엔 테크놀로지의 혁신과 인구통계학적 변화의 접점에서 발생할 어마어마한 기회가 놓여 있는 셈이다.

이런 기회를 가장 먼저 포착한 이들은 과거 베트남전쟁기에 전란을 피해 미국으로 피난갔던 ‘보트피플’의 자손들이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대 등 미국 명문 사학을 졸업한 이들 보트피플의 후손들은 미국을 비롯해 싱가포르, 홍콩 ‘큰손’들의 막강한 자금 후원을 업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 최근 베트남에 번지고 있는 창업 열풍의 배경이기도 하다.

앞으로 20년 뒤, 베트남이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갈 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한국이 과거 스스로 걸어왔던 틀에만 베트남을 갇아놓고 바라봐서는 기회의 문을 스스로 좁힐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동남아시아의 맹주인 베트남에서 알리바바와 같은 거대 기업이 탄생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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