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 소설가 >
한 해가 새로 시작되면 새 달력을 건다. 새 달력을 보면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마음도 새로워지고 각오도 새로워진다. 지난 연말에 여기저기서 받은 달력이다. 사실은 그걸 해가 가기도 전에 먼저 글씨가 큰 달력을 안방에 걸어두고, 부엌에도 하나 걸어두고, 그리고 내 책상 위에 메모가 가능한 작은 책상 달력 하나를 놓아둔다.
나는 새로 달력을 걸 때마다 대관령 아래 산골에 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한 해가 오고갈 때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강릉 시내의 이런저런 가게에서 달력을 얻어오는데 어른들이 좋아하는 달력과 어린 우리가 좋아하는 달력이 다르다. 우리는 멋진 그림이거나 풍경이 인쇄돼 있는 달력이 좋다.
어른들은 멋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달력보다 네모 반듯반듯한 칸에 하루하루 날짜가 큰 글씨가 인쇄돼 있는 ‘상회달력’을 안방에 걸어둔다. 어릴 때 나는 어른들은 멋을 잘 몰라 그런다고 생각했다. 그 달력엔 그날그날의 음력 날짜와 일진까지 나와 있다. 거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안의 제삿날과 대소사를 미리 적어놓는다.
또 매일매일은 아니지만 집안의 어떤 중요한 일들을 달력 숫자 아래 빈칸에 적어 놓는다. 친척의 결혼식 날짜를 적어 놓기도 하고 자식 중 누가 학교로 공납금을 가져간 날이면 그날 빈칸에 ‘누구 학교 공납금 얼마’ ‘누구 수학여행비 얼마’ ‘누구 교복 얼마’ 하고 금액을 적어 놓기도 한다.
아버지는 외양간에 소가 들어온 날과 나간 날, 또 암소의 인공수정일, 송아지 출산일까지 적어 놨다. 어른들한테는 글씨가 크고 여백이 많은 그 ‘상회달력’이 일종의 메모장이며 가계부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내가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상달력을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다 보니 청탁받은 원고를 넘겨야 하는 날, 원고 장수, 원고 주제, 담당자 전화번호와 이메일, 그리고 지방 강연일, 미리 잡은 약속날짜 같은 것을 빽빽이 적어놓는다. 휴대폰에도 그걸 입력하지만, 한눈에 살펴보기엔 달력이 편하다.
그런 달력을 15년째 버리지 않고 보관해오고 있다. 보통 달력은 한 해 쓰면 버리기 마련인데, 저 달력이야말로 내가 지나온 날들에 대한 기록이자 물증 같아 쉽게 버릴 수가 없어 어느 해부터인가 한 권 한 권 보관해오고 있는 것이다.
새해 첫날 책상 위 달력을 바꾸면서 지나온 여러 해의 달력을 한꺼번에 펼쳐놓고 봤다. 글쓰기에 더 성실했던 해도 있고, 그렇지 못한 해도 있고, 또 어떤 일로 많이 아쉬워했던 해도 있다.
2017년 새해 달력엔 아직 몇 개의 일정만 적혀 있다. 어느 신문 신춘문예 시상일과 원고 마감일, 그리고 외부 강연 일정이 하나 잡혀 있다. 아직 빈칸뿐인 저 달력에 이제 많은 일이 쌓여갈 것이다.
여러분도 앞으로 달력을 버리지 말고 한번 보관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달력에 적힌 글자 하나하나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여러분의 추억이 될 것이다. 내가 지나온 시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삶의 현장이 바로 그 달력에 있다.
조금 늦은 인사지만, 또 나라 안팎으로 어지러운 일도 많지만 여러분 모두 희망찬 새해가 되길 바란다.
이순원 <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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