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러시아 외교관 35명 추방 조치
푸틴, 맞대응 자제…"무책임한 외교 않을 것"
트럼프도 "미국, 앞으로 나가야" 논란 확산 경계
[ 워싱턴=박수진 기자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임기 만료를 22일 앞두고 대외 외교에서 초강경 카드를 연이어 꺼내 들면서 국제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이스라엘과 정착촌 건설을 놓고 정면 충돌한 데 이어 29일(현지시간)엔 러시아의 해킹 혐의에 외교관 추방이라는 전례 없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집권 말기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인 외교 행보라는 게 중론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가 자신의 외교·경제 업적을 모두 뒤집으려는 데 대해 ‘대못 박기’ 성격이 짙다는 설명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해킹 관련 개인·단체 정조준
오바마 대통령은 이달 들어 여러 차례 러시아에 대한 보복 조치를 예고했다. 국토안보국(DHS), 국가안보국(DNI),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등 미국 내 정보기관들도 민주당전국위원회(DNC)의 서버 해킹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했다. 민주당 해킹 사고 이후 고비 때마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에게 불리한 정보가 유출되면서 대선판을 흔들었다.
제재 대상은 해킹과 관련한 개인과 기관에 맞춰졌다. ‘정보 요원’으로 분류되는 외교관 35명을 추방 조치했다. 외교와 관련 없이 정보수집 활동과 관련돼 온 뉴욕과 메릴랜드 공관시설도 폐쇄했다. 민주당 해킹 사건을 직접 배후 조종한 것으로 지목된 러시아군 총정보국(GRU), 러시아연방보안국(FSB) 등 5개 기관과 6명의 책임자에 대해서는 미국 내 자산을 동결시키는 등의 경제 제재를 취했다.
미국 은행을 해킹해 1억달러를 빼돌린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보가체프와 해킹으로 개인식별 악성코드를 유포한 알렉세이 알렉세이예비치 벨란 등 2명의 해커에게는 각각 300만달러와 10만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트럼프에 대한 경고 의미도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하와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적 행동규범을 위반해 미국의 국익을 해친 활동에 필요하고 적절한 대응”이라고 말했다. 불법 해킹에 대한 제재일 뿐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번 보복 조치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오바마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지난 6년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및 시리아 내전 개입 등을 둘러싸고 갈등과 반목 관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양국 정상관계는 냉전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가 항상 따라붙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푸틴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않았지만 “해킹은 러시아 최고위층이 지시한 것”이라며 “제재는 이게 다가 아니다”고 말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곧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상호주의 외교원칙을 거론하며 러시아에서 미국 외교관 35명을 추방하기 위해 기피인물(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하자고 푸틴 대통령에게 제안했다고 밝혔다. 미국 대사관 별장과 미국 창고 이용까지 금지하자는 제안도 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러시아 외무부의 강경한 목소리는 불과 몇 시간 만에 나온 푸틴 대통령의 유화적 제스처에 뒤집혔다.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따르면 푸틴은 외무부 발표 후 내놓은 성명서에서 “우리는 미국 외교관에게 문제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추방하지 않겠다”고 했다. 또 “러시아는 새해 연휴에 (미국 외교관) 가족과 자녀들이 그들에게 익숙한 휴양지를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러시아에 등록된 미국 외교관의 모든 자녀를 크렘린궁에 있는 새해와 (러시아식) 성탄절 맞이 트리로 초청한다”고 덧붙였다.
푸틴은 “국제관례에 따르면 러시아 측은 적절한 대응 조치를 취할 모든 근거를 갖고 있지만 대응조치에 대한 권리를 유보할 것”이라며 “‘부엌’ 수준의 무책임한 외교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부싸움 수준의 외교 공방전을 벌이지 않겠다는 취지다.
그는 아울러 “차기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기초해 향후 러시아·미국 관계 회복과 관련된 추가 행동을 취하겠다”고 했다. 푸틴은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러·미 관계를 악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가 조치 뒤집기 힘들 듯
그러나 미 언론들은 트럼프 당선자가 취임 후 바로 이번 보복조치를 뒤집기 힘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가 대통령 행정명령을 법으로 만들겠다고 나서고 있는 데다 존 매케인,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 등 공화당 주류 인사들도 이번 조치를 반기고 있어서다.
트럼프 당선자는 그동안 러시아가 자신의 당선을 위해 민주당 컴퓨터 서버를 해킹했다는 주장에 대해 “웃기는 얘기”라고 일축해왔다.
트럼프 당선자는 일단 말을 아끼고 있다. “미국은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며 “다음주 정보기관 수장들의 보고를 받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자 측은 러시아 대선 개입이 자칫 당선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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