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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향기] 세계 최대 컬럼비아 빙하…'북극의 눈물'과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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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영화로 떠나는 여행

끝없이 펼쳐진 알래스카 빙하 앞에
만년설 산은 그저 평범해보일 뿐

영화 '인썸니아'서 묘사한 동토의 땅
폭포·빙하·온천…야생의 패기가 꿈틀




알래스카의 얼음은 지금 이 시각에도 녹고 있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수상 소감에서 설원을 찾지 못해 지구의 대부분을 뒤지고 다녔다는 말은 실제 상황이다. 알래스카의 빙하는 진흙탕의 민 머리를 드러냈거나, 바다로 추락하면서 수만년간의 생을 다하고 있었다. 그것은 안타깝고 장대하고 비극적인 풍광이다.

지구상에서 빙하를 보려면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높은 산의 만년설에 닿거나 극 지방에 다가가야 한다. 그런데 극지방의 빙하를 보고 나면, 눈에 흰 머리 얹은 만년설 산이 솔직히 평범한 할머니처럼 보인다. 그만큼 산 빙하와 바다 빙하는 스케일과 면적 면에서 차이가 확연했다.

알래스카에서 손쉽게 빙하를 보고 싶다면, 스위드 북방 10마일 지점에 있는 내륙빙하인 엑시트 빙하(Exit Glacier)나 마타누스카 빙하(Matanuska Glasier)를 방문하면 된다. 산과 산 사이 맨땅에 눈이 내려 만들어진 육지 빙하다. 이 빙하들을 보려면 설상차를 탈 필요도 없이 평범한 차로 빙하의 입구까지 가서 걸어서 빙하에 접근하면 된다. 실제로 차를 몰고 가 보니 마타누스카 빙하는 원래 있던 지점에서 한참 물러나 있었다.

마타누스카 빙하 입구는 이미 진흙투성이였다. 매해 빙하가 뒤로 물러나면서 생긴 진흙탕들. 그 진흙 위에 얼기설기 다리가 놓여 있고 시냇물이 흐른다. 말이 시냇물이지 빙하가 녹아서 생긴 차디찬 물이 고여 있는 것이다. 빙하 위에는 크레바스(빙하 사이의 틈)가 있어서 화살표 이외의 방향으로 가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 전문 산악인들은 자일을 갖고 와 더 먼 빙하까지 탐험하기도 하지만 일반인들은 빙하의 초입에서 빙하를 만져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알래스카 빙하는 거대한 폭포나 거대한 화산의 불을 보았을 때처럼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끝이 안 보이는 우주의 마당 같은 계곡을 마주 대하는 느낌이다. 신이 내 가슴에 투명 유리창을 던져 몸이 관통당하는 저린 감각을 느꼈다. 미미하고 작고 하염없이 무기력한 내가 살아남아 거대한 신의 피조물과 마주 대하는 경외감. 수만년간 저들은 이곳에서 미동도 없이 얼어붙어 있다 햇볕 한 줌에 생을 마감해야 한다.

진정한 빙하의 면모를 깨닫기 위해서는 역시 바다 빙하를 보아야 한다. 바다 빙하를 관람하면 빙원, 그 빙원에서 나온 빙하와 빙산, 그 빙산이 다시 녹아서 돌덩이 모양으로 떠돌아다니는 유빙과 해빙 모두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보통 배로 3~4시간은 차가운 북태평양을 항해해야 한다(크루즈 여행은 바다 빙하에 접근하는 안락한 방법이다). 수많은 바다 빙하가 산재해 있는 ‘알래스카의 알프스’라 불리는 발데즈로 향했다.

랭겔 세인트 국립공원에서 발데즈로 가는 길은 알래스카의 리처드슨 하이웨이를 타야 한다. 리처드슨 하이웨이는 인적과 차량 자체가 드물었다. 랭겔 세인트 국립공원의 입구인 코퍼 센터에서 발데즈로 가는 길의 리처드슨 하이웨이는 평생 도저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 길은 세계 10대 고속도로라 불리는 스워드 하이웨이보다 훨씬 웅장하고 신비로운 알래스카의 비경을 숨겨 놓고 있었다. 크루즈 여행만 하거나 기차를 탔다면 이 호수와 산을 볼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발데즈는 1989년 유조선 엑손 발데즈의 원유 유출 사고로 전 세계가 기억하는 항구이기도 하다. 심한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된 적도 있다. 지금은 그때의 상흔을 씻고, 작고 아늑한 항구 도시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발데즈 항구에서 세계 최대 컬럼비아 빙하를 보러 스탄 스테픈(STAN STEPHENS)호에 승선했다. 배멀미약 때문에 처음엔 몸이 물 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웠지만, 바다로 나가니 정신이 번쩍 든다.

바다사자가 천연덕스럽게 부표 위에서 낮잠을 청하고 저 멀리 고래떼의 꼬리와 지느러미가 춤을 춘다. 귀여운 해달이 배영으로 먹이를 즐기는 모습은 환상적이다. 여름에 앵커리지는 반팔을 입을 정도로 덥지만, 빙하 근처에 갈수록 오리털 파카를 입어도 한기가 몸에 스며든다. 그 바다 정원 한가운데 컬럼비아 빙하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그냥 거대한 눈덩이 뭉치나 신기한 얼음덩어리 정도가 아니었다. 수만년의 눈이 쌓인 빙하는 흰색이 아니라 시리디시린 푸른 수정 빛깔이 났다. 배는 수많은 유빙을 조심스럽게 헤치고 나아가 빙하의 코앞에 다가간다. 수십 ㎞에 달하는 푸른 빛 빙하가 쩍쩍 갈라지며 맨살을 드러낸다. 얼음덩어리들은 순서대로 묵묵히 바다로 추락하고 있었다. 가끔 빙하가 추락하며 내는 굉음은 비명이라기보다 조용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인썸니아>나 <프로즌 그라운드>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같은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들은 알래스카를 하얀 눈 위에 인간의 피가 번지는 동토의 땅, 식은 태양으로 인해 잠 못 이루고 신음하는 어둠의 땅으로 묘사한다. 역사적으로 알래스카는 석유, 사금, 모피가 나오는 노다지 땅으로 인식됐다. 실제로 본 알래스카는 그 이상이다. 바다와 산, 호수와 폭포, 빙하와 온천이 모두 존재하는 야생의 패기가 가득한 곳. 동시에 지구의 마지막 찬 기운 한 자락이 인간의 이기심으로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증명하는 북극의 눈물방울 같은 곳이기도 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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