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모메 식당>의 무대 핀란드 헬싱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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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인 사진치료 학회 일로 헬싱키와 항구도시 투르크에 여름과 겨울 두 번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여름 헬싱키는 밤 10시에도 날이 훤해 축구장에서 남자들이 축구를 했다. 반면 겨울의 헬싱키는 겨우 서너 시간만 햇빛이 드는 어둠과 눈의 도시였다. 여름에 밤을 만들기는 쉬웠다. 호텔에서 암막커튼을 치고 자면 되니까. 그러나 겨울에 낮을 만들기는 불가능했다. 아무리 전등을 켜도 그 빛은 태양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회장에 들어가면서 세미나실 밖에 걸어둔 외투 안의 휴대폰을 도난당했다. 핀란드에서 도난이라니. 근 2주간 햇볕도 쐬지 못하고, 경찰서에 왔다 갔다 하면서 진을 빼니 피로가 몰려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비로소 카모메 식당의 주인공 사치에의 대사가 떠올랐다. “세상 어딜 가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고,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법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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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으로 다니는 기차 트램을 타면 헬싱키의 어느 관광지든 편하게 다닐 수 있다. 헬싱키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축물은 템펠리아우키오(암석 교회)였다. 1969년 티모와 투오모 수오말라이넨 형제가 거대한 암석을 쪼아내 공간을 만들어낸 루터파의 교회다. 나무 좌석도 원형으로 배치돼 있고 경건하면서도 단순한 건축형태가 현대 건축의 백미를 보는 것 같다. 템펠리아우키오는 음향 전문가와 지휘자가 처음부터 설계에 참여해 교회 내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울림통처럼 만들어졌다. 성가라도 부르면 마치 동굴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절묘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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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 있는 시벨리우스 공원이나 우스펜스키 사원도 인상적이지만, 추천하고 싶은 곳은 헬싱키 앞바다에 있는 수오멘린나 섬이다. 수오멘린나는 헬싱키 항구에서 2유로만 내면 배를 타고 15분 안에 도착한다. 이곳의 존재를 헬싱키에 와서야 알게 됐는데,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방문했다. 그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돼버렸다. 스웨덴은 섬을 점령하고 요새를 건축했다. 수오멘린나 요새에는 18세기 후반 스웨덴이 건설한 성벽 및 터널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꽃과 풀과 해협이 어우러진 수오멘린나는 요새라기보다 햇볕 찬란한 북유럽의 공원을 더 닮았다.
사실 관광보다 핀란드에서 반드시 해보고 싶었던 경험이 바로 핀란드식 사우나다. 핀란드에서는 1가구 1사우나는 기본이고, 호텔, 보트, 버스, 심지어 헬싱키 국회와 대사관에도 사우나가 있다고 한다. 사우나에 입장할 때 원하면 수영복을 가져오라는 안내문에 스토크만백화점에서 거금 100유로를 들여 수영복까지 샀다. 학회가 끝나고 우리를 안내한 주최 측을 따라 가보니 사우나는 목욕탕이 아니라 호숫가 오두막집에 있었다. 탈의실에서 수영복을 갈아입고, 여자 사우나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수영복을 입은 여자는 나 하나였고, 3층으로 된 사우나 선반에 세계에서 모인 30여명의 심리치료사들이 전부 옷을 벗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사우나 내부 중앙에는 커다란 돌이 있는데, 이 돌이 달궈졌을 때 찬물을 끼얹어 자욱하게 수증기를 만들어낸다. 서로 통성명도 하고 수다를 떠는 사교의 장인 사우나. 어느 시점이 되면 재빨리 맨몸으로 길을 달려서 호수로 뛰어든다. 자연의 품에 풍덩 빠져드는 것이다. 겨울엔 호수 얼음을 깨고 들어가는데, 사우나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가 클수록 쾌감이 더 진했다. (물론 남자들과 시차를 둬 그들과 마주치지 않게 배려해줬다).
사우나를 다 하고 나니, 오두막 거실에서 핀란드 친구들이 벽 난로에 구운 소시지와 얼음에 재운 맥주를 건넨다. 사우나를 집에서 가족끼리 하면 자연스럽게 가족치료가 되겠구나 싶었다.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데, 서양 친구들은 ‘너 정말 몸매가 해골 같다’고 진지하게 말을 건넨다. (내 몸무게는 한국 기준으로 전혀 마르지 않았다) 워낙 뼈가 굵은 바이킹의 후예들이라 30명 중 나는 아주 마른 축에 속하긴 했다. 사우나 경험은 내게 어떤 해방감을 준 것이 틀림없다. 고백컨대 난 그 후로 단 한번도 다이어트를 한 적이 없다.
핀란드는 그런 곳이었다. 호수가 20만개, 섬이 17만개. 그래서 많은 집이 섬이나 호수를 소유하고 있고, 배를 타고 자신의 섬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간다. 나 역시 瑾?친구들과 섬에 가서 천천히 2시간 동안 담소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이후엔 누군가 기타도 치고, 춤도 추고 즐거운 시간이 흘러갔다. 자작나무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자연 속에서 소박하지만 풍성하게 삶을 꾸려 나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카모메 식당 속 낙원은 아닐지라도 이곳에선 분명히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핀란드에는 다른 시간의 결이 존재한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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