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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하야 '결정타'는 워터게이트 아닌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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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대신 증거 은폐·특검 해임 명령
미국이 분노한 건 도청 자체보다 닉슨의 권력남용과 뻔뻔함



[ 이상은 기자 ]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워터게이트호텔 내 민주당 전국위원회 도청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72년 6월17일이다. 많은 사람은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연루돼 곧바로 하야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실제로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1974년 8월9일이다. 약 2년2개월 동안 그는 자리를 지켰다.

자리를 지킨 정도가 아니었다. 1972년 11월7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538명 선거인단 표 중 520표를 얻으며 압도적으로 재선됐다. 워싱턴포스트가 사건 발생 이틀 후부터 공화당과의 연계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고, 10월10일엔 미 연방수사국(FBI) 관계자가 공화당과의 관련성을 인정했지만 사람들은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3년 5월 상원이 워터게이트 위원회를 만들어 청문회를 하고, 그 내용이 TV로 생중계되면서부터다. 그해 7월13일 청문회에 출석한 알렉산더 버터필드 닉슨 부보좌관이 “1971년부터 닉슨은 집무실에서 이뤄진 모든 대화를 녹음했다”고 폭로하면서 사건의 폭발력이 커졌다.

닉슨은 솔직하게 사과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은폐를 지시했다. 6월23일, 닉슨은 내용이 일부 삭제된 테이프를 공개하며 “비서의 실수로 훼손됐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10월20일, 닉슨은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하라고 명령했다. 법무부 장관이 지시를 따를 수 없다며 사임했다. 권한대행이 된 윌리엄 러클즈하우스도 거부하고 사표를 던졌다. 윌리엄 보크 송무차관이 대신 콕스 검사를 해임했다. 미국 언론은 이를 ‘토요일 밤의 대학살’이라고 보도했다.

닉슨이 연루됐다는 버터필드 증언 후에도 그는 1년여 더 대통령 노릇을 했다. 정치권에선 대통령 집무실 녹음테이프 원본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며 ‘통치행위’라고 변명했다. 테이프 내용을 공개하면 안보상 큰 위협을 받는다고도 주장했다.

미국 정부가 원고가 돼 피고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테이프를 공개하라는 재판을 제기했다. 연방대법원은 1974년 7월24일 미국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3개의 삭제 전 원본 테이프가 의회에 제출됐다.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음이 명백해지자 의원들은 모두 등을 돌렸고, 하원 사법위원회의 세 차례에 걸친 탄핵권고 표결은 모두 가결됐다.

닉슨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당하는 대통령이 될 것인가, 최초로 하야하는 대통령이 될 것인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미국인들은 도청 행위 자체보다는 그가 권력을 남용하고, 비위 사실을 은폐하려고 애썼으며, “나는 사기꾼(crook)이 아니다”며 뻔뻔한 탕뼈?늘어놓았다는 것에 더 분노했다.

1974년 8월8일 닉슨은 하야 연설에서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미국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은 모든 시간을 직무에 쏟을 수 있는 대통령과 모든 시간을 직무에 쏟을 수 있는 의회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여러 문제에 직면한 지금은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개인적인 변론을 위해 몇 달씩 싸움을 계속하게 되면 대통령과 의회 모두의 시간과 관심이 거의 모두 빼앗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일 낮 12시를 기해 대통령직을 사임하려고 합니다.”

비록 탄핵이 임박해 불명예를 피하려 스스로 자리를 내놓긴 했지만 닉슨은 (무고하지 않은) 자신의 변론을 위해 무리하게 버티며 국가적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에 결국 동의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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