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익 정치부 기자)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 씨의 국정 개입 스캔들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정부의 수많은 정책과 사업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지요. 최씨의 행각이 드러난 계기는 대통령 연설문 개입이었습니다. 최씨가 발표되지 않은 대통령 연설문안을 사전 입수하는 등 연설에 개입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대통령도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시인했습니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를 접한 국민들은 ‘어떻게 전문가도 아닌 민간인이 대통령 연설문에 손을 댈 수 있냐’며 허탈해했습니다.
최씨의 연설문 개입 논란을 보면서 영국 소설가 로버트 해리스의 ?유령 작가?(RHK)라는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로버트 해리스는 ?폼페이?, ?에니그마? 등 주로 역사에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결합해 호평 받은 작가입니다. ?유령 작가? 속 주인공은 대필 작가입니다. 그는 전직 영국 수상 애덤 랭의 자서전을 대신 써달라는 청탁을 받게 됩니다. 돈도 돈일뿐더러 대필 작가로서의 경력을 크게 올릴 기회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제안을 수락합니다. 미국의 외딴 곳에서 애덤 랭과 자서전 작업을 하던 중 그가 전쟁범죄에 개입했다는 혐의가 공개되고 주인공은 얼떨결에 수상의 간단한 입장 표명 자료까지 만들게 됩니다. 제목 그대로 유령이자 전직 수상의 입이 된 것이죠. 어느 날 알 수 없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대필 전임자가 남긴 메모를 우연히 본 뒤 이 유명한 의뢰인에게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게 되며 이야기는 급박하게 전개됩니다.
2007년 이 작품이 출간됐을 때 영국에선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전직 수상 애덤 랭이 바로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너무 닮았기 때문입니다. 인물의 스타일을 비롯해 토니 블레어 재임 당시 국제적으로 문제가 됐던 사건들이 소설 속에 들어 있어 영국 독자들 사이에선 화제가 됐습니다. 물론 토니 블레어의 연설에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유명인 연설이나 자서전에 제3자가 참여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전문 작가와 함께 자서전을 만들었다고 미리 알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할 때 전문가의 손길을 얻는 것이 그리 나쁜 방법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연설은 국정 방향을 알리는 것이기에 어떤 연설보다 엄격하게 관리돼야 합니다. 최순실씨는 연설 전문가도 아니었고 올바른 방향도 제시하기는커녕 혼란만 일으켰기에 국민들의 분노가 치솟은 것이겠지요. 최순실 게이트와 ?유령 작가?는 정치와 대필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하다못해 주인공도 ‘대필 전문’이라는 타이틀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이처럼 연설문을 하찮게 여겼다면 다른 국가 정책도 허술하게 관리했다고 의심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겁니다. (끝) / dir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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