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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기른 정치인의 득과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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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진 정치부 기자)“남자가 돼 보면 알아요. 이거 깎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지난달 전남 진도 팽목항을 시작으로 한달동안 민생투어를 했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나타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무성대장)’라는 별명보다 ‘털보대장’이란 별명이 더 와 닿는 상황인데요. 그는 염색도 하지 않은 반백의 머리에 양복 대신 허름한 체크 남방 차림을 입고다녔습니다. 김 전 대표는 여권 내 차기 대권 주자입니다.

비슷한 기간 수염을 깎지 않은 또 다른 정치인이 있었는데요. 지난 6월 중순부터 약 1개월 동안 네팔과 부탄에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했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입니다. 네팔에 있는 내내 면도를 하지 않고 김 전 대표처럼 흰 턱수염을 길렀습니다. 그의 측근은 “일상에서 벗어났을 때 남성들이 흔히 하는 행동 이상의 의미는 없다”며 “정계 입문 전인 2004년 히말라야에 갔을 때도 수염을 길렀다”고 해명했는데요. 이런 문 전 대표 역시 야권내 유력 대권 주자입니다.

노숙자를 연상케 하는 지저분한 수염을 좋아하는 정치인으로는 박원순 서울시장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 시장?당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서울시장 후보 사퇴 기자회견장에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리산으로 백두대간 종주를 떠났다가 당초 일정보다 앞당겨 귀경했던 그였습니다. 일각에선 ‘웬 거지 코스프레냐’며 논란을 부르기도 했지만 당시 5%에 불과했던 박 시장의 지지율은 단숨에 50%대로 뛰어올랐습니다. 안 의원과의 단일화 덕도 있었지겠만 박 시장의 ‘털복숭이’같은 모습이 서민적 이미지로 비춰지면서 순식간에 시너지를 냈다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박 시장 역시 재선에 성공하며 유력 야권 대선 후보군에 속해 있습니다.

앞서 세 사람보다 먼저 수염을 기른 원조는 사실 손학규 전 더민주 상임고문입니다. 경기도지사 퇴임 후인 2006년 장장 1만2000여㎞를 다녔던 ‘100일 민심대장정’과 이듬해 ‘2차 민심대장정’ 기간동안 수염을 길렀습니다. 당시 탄광에서 석탄가루를 뒤집어쓰고 땀과 수염이 뒤범벅된 채 찍힌 그의 사진을 놓고 한편에선 ‘의도된 연출’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는데요. 지난 2008년 18대 총선과 지난 2013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한 후에도 손 전 고문은 칩거에 들어가면서 수염을 길렀습니다. 손 전 고문 역시 잠재적 야권 대선주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최근들어 여야 할것 없이 대선 주자들이 수염을 기르기는 통과의례처럼 되고 있습니다. 수염은 서민적이고 소탈한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는 ‘이미지 정치’의 대표적인 소재입니다. 당 대표, 대권 주자라는 묵직한 직위를 내려놓고 옆집 아저씨와 같은 푸근한 이미지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로도 풀이되는데요.

한 정치 전문가는 “서민 코스프레를 보여주고 싶은 남자 정치인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상투적인 행위가 수염기르기”라며 “속세에 신경쓰지 않고 초탈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도구”라고 해석했습니다. 김 전 대표와 손 전 고문은 시골 마을을, 문 전 대표는 히말라야 산맥을, 박 시장은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 수염을 길렀습니다. 공교롭게도 모두 현실 정치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곳들입니다.

하지만 수염이 이미지 정치의 소재로만 쓰이진 않았는데요. 고뇌와 참회의 이미지로도 부각된 적도 있습니다. 이주영 새누리당 의원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인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130여일간 진도에 머물며 수염과 머리카락을 깎지 않았습니다. 언론에선 그의 수염을 ‘참회’라는 긍정적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1980년대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가택연금됐던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민주 회복 등 5개항을 내걸고 23일간 곡기를 끊었습니다. 수염을 기른 헬쓱한 얼굴의 김 전 대통령 흑백사진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수염의 정치학’에는 득과 실이 있습니다.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의 공통점은 일단 언론에 자주 노출돼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수염을 기른 정치인들은 평소 말끔한 모습과 달리 시각적으로 ‘집중’을 받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냅니다. 정치인이 수염을 기른 채 공식 석상에 등장하면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죠.

또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는데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덥수룩한 수염을 깎고 공식석상에 나타나면 수염을 기를때와 상반된 결연한 이미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대중은 ‘고심끝에 뭔가 결심을 하고 왔구나’라는 느낌을 받는다는 겁니다. 민생 탐방을 마친 김 전 대표는 국회에서 ‘격차해소 경제교실’을 여는 등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하기 전 수염을 말끔히 깎았고 문 전 대표도 네팔에서 기른 수염을 모두 자른 채 귀국했습니다. 모두 본격적인 대선 행보를 하기에 앞서 마음가짐을 단단히하겠다는 ‘정치적 메시지’로 비춰집니다.

하지만 진정성 있는 변화나 행동이 없는 정치인의 ‘수염기르기’는 ‘쇼 아니냐’, ‘코스프레처럼 보인다’는 식의 부정적 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수염을 길렀다고 지지율이 오른 사례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박 시장 역시 2011년 수염 효과가 지지율 급등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지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단순히 수염을 기르고 외모만 바꾸는 1회성 이미지 변신보단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행동을 꾸준히 보여줌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얻는게 대선주자들에게 장기적으로 더 유리한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끝) /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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