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론조사 기관으로 전락한 정당 싱크탱크
여야 연구소 활동 절반 이상 여론조사 급급
정당 입법기능 지원·정책노선 연구는 뒷전
원장 수시로 교체…전문 연구인력도 태부족
[ 김재후 기자 ] 이관섭 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은 지난 1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후배들에게 뼈있는 말을 던졌다. “권력은 정부에서 여의도로 가버렸다. 이대로 가면 정부가 정책으로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상당수 정책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거나, 넘더라도 원안과는 다른 모습으로 왜곡되는 현실을 우려한 것이다.
국회가 커진 권력에 걸맞은 능력을 갖췄는지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정당의 이념 가치와 정책 노선을 치열하게 토론하고 연구하는 ‘브레인 기능’이 없다는 게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초등학생 수준인 정당 연구소
새누리당 전신인 민주자유당은 1995년 당 정책 연구소인 여의도연구소를 설립했다. 한국 정치 사상 첫 정당 싱크탱크였다. 당의 입법 기능을 지원하고 정책 노선을 연구하자는 게 설립 취지였다. 2013년에는 여의도연구원(여연)으로 이름을 바꿨다. 야당도 비슷한 목적으로 잇따라 자체 연구소 설립에 나섰다. 2006년 민주통합당이 국가전략연구소를, 열린우리당은 열린정책연구소를 세웠다. 양당의 통합에 따라 2008년부터 민주정책연구원(민정연)으로 합쳐 운영되고 있다.
설립 취지와 달리 정당 연구소들은 사실상 당 여론조사 기관에 머물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한국경제신문이 여연과 민정연의 연구활동을 전수조사한 결과 지난해 정당 연구소의 활동 중 절반 이상이 여론조사였다. 여연은 각종 토론회 등을 포함한 활동 204건 중 여론조사가 142건에 달했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진 2012년과 2014년에는 두 연구소의 여론조사가 각각 822건, 226건으로 전체 활동의 85.2%, 60.9%에 달했다.
◆보고서 내지 않는 연구소
연구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당의 선거 전략과 공약 등을 만들어내는 만큼 정책 연구도 한다. 지난해 여연과 민정연이 수행한 연구정책과제는 각각 140건, 144건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6개월 이상의 중기 과제는 한 건씩에 불과했고, 1년 이상의 장기 과제는 전무했다.
연구정책과제를 수행했다지만 정작 결과물은 없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지난해 여연과 민정연이 보고서 등 자료를 발간한 횟수는 각각 37건과 57건이다. 단편적인 이슈 브리핑이나 토론회 자료 등이 대부분이다. 민정연은 그나마 5건의 연구보고서를 냈지만 여연은 한 건도 없다.
◆예산도, 인력도 부족
정당 연구소들은 2004년 개정된 정당법과 정치자금법에 따라 정당 국고보조금의 30%를 쓰게 돼 있다. 다른 수입원은 전혀 없다. 여연이나 민정연의 작년 예산에서 국고보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93%, 79%였다. 나머지는 전년도 쓰지 않은 예산에서 넘어온 이월금이다.
여연과 민정연의 지난해 예산은 각각 101억원, 77억원이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은 여론조사에 쓰였다. 운영비를 제외하면 정작 연구과제에 쓸 돈이 모자란다. 이러다 보니 유능한 연구인력을 데려오기가 힘들다.
연구소에 당직자를 파견한 뒤 월급만 연구소에서 받아가고 선거 때가 되면 당직자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문병주 민정연 연구기획실장은 “당직자 기준에 맞춰 박봉의 월급을 주다 보니 박사급 인재를 영입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다”고 했다. 여연이나 민정연이나 박사급 초임은 대졸 중견기업보다 낮은 수준이다. 이형선 여연 연구기획실장은 “연구원의 재교육이나 해외연수 등은 꿈도 못 꾼다”고 했다.
연구원장이 수시로 바뀌는 것도 문제다. 양당 연구소 관계자들은 “원장 임기는 2년으로 당헌당규에 보장돼 있지만 당 지도부가 교체되면 연구원장도 자연스레 바뀐다”며 “일관된 원칙을 갖고 연구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김재후 기자 h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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