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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공학자 김동일, 공장서 터득한 기술 교단서 가르쳐…실학 전통 계승한 산학협력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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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뽑은 과학자 (17)

엔지니어 시절 7개 특허 취득…해방 후 서울대 공대 초대학장
원자력·핵화학공업 중요성 인식…산학 넘나들며 발전에 초석
사재 출연해 석유 탐사·개발…과기단체 통합 주도적 역할도



[ 박근태 기자 ] 석천(石泉) 김동일 전 서울대 교수(1908~1998·사진)는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 전통을 계승한 산학 협동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광복 직후 38세의 나이로 서울대 공대 초대 학장을 맡았다. 하지만 생애 대부분을 학교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국내 과학기술과 화학·섬유·에너지 산업의 기반을 다지는 데 바쳤다.

실학 전통을 계승한 그의 삶은 고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평양고보 시절 책을 통해 비누와 치약, 창문 유리 등 우리 생활에서 사용하는 많은 물건에서 화학이 유용하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술자가 되어 작은 공장을 운영하겠다는 꿈을 꿨다”고 훗날 회고했다. 그는 일본인도 인정한 탁월한 엔지니어였다.

조선인 차별 정책으로 일자리를 얻기 어려웠던 당시, 가까스로 일본 회사에 취직한 뒤 안전유리와 인조견사 제조 방법을 처음 개발해 특허 7건을 냈다. 민족기업인 경성방직의 영등포 공장장으로 일하며 일본인 공장을 능가하는 생산 실적을 올려 상처받은 민족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되살렸다.

이런 풍부한 산업체 경력은 학생을 가르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광복 직후 그가 서울대 공대 초대 학장에 취임할 무렵 학교는 좌우 이념 대립으로 신입생조차 뽑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는 상당수 교수가 해직되자 학장 신분으로 10개 과목을 직접 강의하는 등 학생 교육에 매진했다. 또 여학생에게 공대 문턱을 낮춰 여성들이 기술자가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6·25 전쟁 혼란 속에서 전국에 흩어진 학생과 교수를 모아 부산에서 학교를 다시 열었다.

그는 일찍부터 에너지 자원 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강의실 밖으로 나섰다. 1959년 문을 연 한국원자력원 초대 상임원자력위원으로 활동하며 제1차 원자력 학술회의를 치르고 핵화학공업개론을 가르치는 등 원자력 발전의 초석을 놨다. 1971년에는 사재를 출연해 재단법인 한국석유산업개발센터를 세우고 국가적으로 절실한 석유 탐사와 개발 연구에 나서기도 했다. 액화천연가스(LNG) 활용 가능성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사전 연구 조사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요업과 섬유 분야 전문가이기도 한 그는 1960년대 최신식 시설을 갖춘 종합 화학공장인 흥한화섬 인견사 공장을 지어 화학섬유공업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1960년대 초만 해도 과학기술계 활동은 미미했다. 정부와 산업계?과학기술 진흥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과학기술 분야 학회의 구심점 역할을 할 단체가 필요했다. 김 전 교수는 1966년 5월19일 열린 ‘제1회 과학기술자대회’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과학기술 단체의 힘을 모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과총) 창립을 발의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또 이 자리에서 과학기술 전담부처인 과학기술처(현 미래창조과학부)와 과학기술진흥법을 제정하고, 과학자 처우 개선과 과총회관 건설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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