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뽑은 과학자 (6) 장기려
한국의 슈바이처
간장수술 돌파구 '신의 손'
김일성 맹장 수술때 "장기려 데려와라" 일화도
미생물·세균 배양도 일본 앞서
[ 박근태 기자 ] 고(故) 장기려 박사(1911~1995)는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소외 계층을 위한 봉사활동에 헌신했다. 북한에서 의사로 있다가 6·25전쟁 때 부산으로 내려온 그는 천막 병원을 짓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국내 첫 의료보험조합과 고신대복음병원을 설립하고, 여러 의과대학에서 외과교수 후진을 양성했다. 그를 ‘한국의 슈바이처’로 기억하는 이가 더 많지만, 그의 인술 뒤에 가려진 의학적 업적은 상당하다. 제자인 신동훈 고신대병원 간담도췌장외과 교수는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는 연구와 도전 정신을 보여준 의학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일본 나고야대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뒤 미생물에 관심을 보였다. 1940년대만 해도 항생제가 많지 않아 폐렴은 물론이고 맹장염에 걸려 사망하는 일이 흔했다. 살림이 어려운 환자들은 제대로 된 약 한 번 쓰지 못했다. 그는 무엇보다 한국인에게 가장 흔한 세균을 찾는 일이 시급하다 ?봤다. 직접 실험실에서 복막염과 폐렴 환자에게서 얻은 세균을 배양한 그는 1943년 당시 한국인에게 많은 균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서양 의학을 훨씬 먼저 도입한 일본 의사들보다 앞선 성과를 내기도 했다. 가시에 찔린 피부에 세균이 침입하면서 썩는 질환인 괴사성근막염의 조직을 연구한 그의 논문은 일본의학회 학술지보다 3~4년 앞섰다.
그는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한 간 수술에서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했다. 1943년 국내에서 최초로 간암 환자의 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일본 의학계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수술을 칼과 가위 등 초보적 수술도구로 해낸 것이다. 1940~1950년대만 해도 간은 쉽게 손댈 수 없는 미개척 분야였다. 간 질환에 걸리면 속수무책으로 죽을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959년에는 50대 여성 간암 환자의 간을 70% 정도 잘라내는 대량 간 절제 수술에도 성공했다. 당시 그가 시도한 좌엽확대술은 국내 간장외과 의사들은 물론 의학이 발전한 해외에서도 도전하지 못한 신개척 분야였다.
인터넷도 없고 전쟁 직후라 변변한 의학서적조차 얻기 쉽지 않던 시절, 그는 제자들과 시체 해부를 하며 실력을 다졌다. 3년간 실습과 연구를 반복한 끝에 간 내부 구조를 파악하고 간엽을 8구역으로 구분한 수술법을 채택했다.
신동훈 교수는 “당시 간 절제수술은 환자들이 합병증이나 출혈로 숨지는 일이 많았다”며 “선생은 칼과 가위밖에 없는 환경에서 도전 의식으로 수술을 성공시켜 후배 외과의사들에게 큰 용기를 줬다”고 말했다. 대한의학회는 이런 그의 공적을 기려 ‘간의 날’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봉사로 살았지만 분단의 아픔을 피해가지 못했다. 장 박사는 북한의 김일성이 맹장수술을 받을 때 그를 모셔오라고 할 정도로 북에서도 인정받았지만 1950년 12월 중공군 참전 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어머니와 아내, 다섯 자녀를 남겨둔 채 둘째 아들과 내려와야 했다. 그는 타계할 때까지 45년간 이산가족의 한 사람으로 살았다. 신 교수는 “선생은 손해를 봐도 허허할 정도로 온화한 성격이었고 누구에게나 따뜻하게 대했다”며 “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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