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전형적인 양당제 국가다. 민주·공화 양당이 여당·야당을 바꿔가며 미국 정치를 이끌어 왔다. 현재 야당인 공화당이 창당된 것은 162년 전이다. 미 공화당은 그동안 한결같이 보수가치를 추구해 왔다. 자유무역, 작은 정부, 헌법 존중, 기업 자율 확대 등이 기본 노선이다. 그런 공화당이 대선 후보자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 때문에 딜레마에 빠졌다. 트럼프가 전통적 보수가치와 충돌하는 공약을 내놓자 당내에서 다른 ‘제3 후보를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해 6월 트럼프의 대선 후보 출마 선언 당시만 해도 그가 공화당 후보가 될 것으로 예상한 전문가나 언론은 거의 없었다. 그런 트럼프가 높은 지지율을 얻는 이유는 뭘까.
경제불안 심리 파고들어
트럼프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부동산 재벌’이다. 경제전문 격주간지 포브스는 그의 재산을 5조원 정도로 추정했다. 트럼프는 ‘성공한 기업인’의 이미지를 내세워 미국인의 심리를 파고들고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을 전면 재검토하겠는 공약이 대표적 사례다. 그는 FTA로 堅?내 일자리가 줄어들고 무역적자가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25일 미 상원 전체 회의에서 그는 “한·미 FTA 이후 미국의 무역적자만 늘어났다”며 “비슷한 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경제전문 방송 CNBC는 실업률이 전국 평균(5%)을 웃도는 카운티에서 트럼프의 득표율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보도했다. 트럼프를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트럼프는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도 자극하고 있다. 대선 라이벌 힐러리 클린턴(민주당 대선 후보)이 월가(미국 뉴욕 맨해튼 금융 밀집 지역)와 가깝다는 이미지를 부각하고, 자신은 서민을 대변한다고 강조한다. 부자 증세를 내세워 힐러리는 ‘부자 옹호 후보’ 자신은 ‘서민 옹호 후보’라는 대립구도를 만들고 있다. 부자증세, 저소득층 면세 확대는 중산·서민층 표를 겨냥한 공약이라는 분석이 많다.
미국 이익 강조
트럼프의 반이민자 정서는 노골적 수준이다. 그는 자신이 집권하면 1100만여명으로 추정되는 불법 체류자를 모두 추방하겠다고 공언했다. 불법 체류자로 인해 미국인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저임금이 지속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동맹국과의 관계 재설정도 민족주의·고립주의 성격이 짙다. 그는 한국이 ‘안보무임승차’를 한다며 주한미군 비용을 한국이 전액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미군 주둔비를 한국과 미국이 절반 정도씩 나눠 부담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다수 전문가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은 한국 안보에 도움이 되지만 미국의 전략적 의미도 있는 만큼 분담이 합당하다고 지적한다.
트럼프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도 중립을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미국에 직접적인 이익이 되지 않으면 국제사회 분쟁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철저히 ‘자국 이익 우선’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의미다. 이는 또한 2차대전 이후 자임한 ‘세계의 경찰 역할’을 포기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권자들이 이런 트럼프에게 지지를 보내는 것은 상당수 미국인이 내심 ‘불간섭주의’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은 “미국에 사는 백인들은 누구도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지 못하던 얘기를 거리낌 없이 말하는 트럼프를 보며 지지를 보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미국의 주인이야’라는 식의 민족주의적 흐름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고개드는 제3후보론
미 공화당은 창당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당의 정체성과 추구하는 가치에 정면 대치되는 트럼프를 공화당의 공식 후보로 지명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화당 주류 일각에서는 트럼프를 배제하고 제3당 창당을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대선을 포기하더라도 당의 정체성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지난 5일 CNN 방송에 출연해 “현재로서는 트럼프를 지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작은 정부와 자유무역 옹호, 동맹관계 중시, 낙태 반대 등 주요 이슈에서 공화당 지도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트럼프를 당 대선 후보로 받아들여야 할지,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당의 정책을 수정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41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부시와 43대 대통령을 지낸 아들 조지 부시 모두 트럼프 지지를 선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창당 162년 만에 대선 후보로 최대의 딜레마에 빠진 미 공화당 지도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부작용 목소리 커지는 '트럼프노믹스'
트럼프의 대선 공약이 몰고 올 부작용에 대한 비관적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 우파성향 싱크탱크인 ‘아메리칸 액션포럼’은 지난 5일(현지시간) 트럼프의 공약대로 불법 체류자를 전원 추방하면 미 경제성장률이 2~3%가량 줄어들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에는 1100만여명의 불법 체류자가 있고, 이 중 680만명이 고용돼 있다. 트럼프는 이들로 인해 미국인의 일자리가 줄고, 저임금이 지속된다며 자신이 집권하면 불법 체류자를 모두 추방하겠다고 공언했다.
아메리칸 액션포럼은 이렇게 되면 민간부문 총생산이 3815억달러(약 440조8000억원)~6232억달러(약 720조1000억원) 급감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국내총생산(2014년 기준 17조4200억달러)의 2.2~3.6%가 감소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싱크탱크는 “이 분석은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를 추방했을 때 잃게 될 노동 가치만을 고려했다”며 “불법 이민자가 소비와 투자, 사업 등으로 미국 경제에 기여하는 부분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난 3월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도 트럼프식의 중국과 멕시코에 대한 고율관세 부과 시 미국 경제가 교역과 투자 감소로 연간 경제성장률이 4.6%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일자리는 700만개 줄고, 실업률은 9.5%(현재 5%)로 오른다는 전망도 내놨다. 무디스 측은 “미국의 고율관세를 매기면 중국 멕시코가 불황에 빠지겠지만 동시에 미국도 1년 안에 불황에 빠져들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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