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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공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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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8)

자주·자강 외친 독립협회…고종이 해산시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극심한 공포에 빠졌습니다. 왕비가 바로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참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길거리 가다가 당한 일도 아닙니다.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궁궐 저 깊은 곳에서 그런 엄청난 변을 당했지요. 그러니 궁궐도 안전한 곳이라고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고종은 궁궐 안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음식에 독이 들어 있을까 두려워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이렇게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나라 다스리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요?

을미사변·단발령과 반일 감정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조선에는 다시 친일 내각이 세워졌습니다. 그 중심에는 갑오개혁의 주역이었던 김홍집이 있었습니다. 김홍집 내각은 을미개혁을 실시했습니다. 을미개혁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조선의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정하고 태양력을 들여왔으며 단발령과 종두법을 시행했다는 것입니다.

조선 백성들은 단발령에 크게 반발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는 무엇보다 철저하게 따르는 유교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몸은 물론 그에 딸린 머리카락이나 수염까지 모두 부모님이 주신 것이니 이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평생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나라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라 하니 난리가 난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하던 백성들은 이 조치의 배경에 일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발령에다 명성황후의 시해까지 겹쳐 일본을 미워하는 감정이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의병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크게 흔들리자 일본 사람들은 고종에게 머리를 자르는 모범을 보이라고 위협했습니다. 고종은 탄식하며 자신과 세자의 머리를 깎도록 허락했습니다.

고종, 궁녀 가마를 타고 도피

조선 전체가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지만 고종은 백성들의 고통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두려움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복궁에 갇힌 신세가 된 고종은 궁궐 밖에 사는 엄상궁을 불러들였습니다. 고종은 엄상궁을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엄상궁을 비롯한 몇몇 측근은 외국 공관이 밀집한 서울 정동으로 피신할 것을 고종에게 권했습니다. 이런 의견을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알리자 베베르는 본국의 허락을 얻어 고종을 공사관에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물론 조선에 친러 내각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러시아가 싫다할 리가 없었습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세자는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을 몰래 빠져나갔습니다. 임금이 타고 다니는 제대로 된 가마가 아닌 궁녀의 가마를 탄 채로 말이지요. 이때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여섯 달 만이었습니다. 엄상궁은 이 일이 있기 얼마 전부터 궁녀의 가마를 영추문에 수시로 드나들게 했습니다. 그 덕에 경비병들을 속이고 경복궁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아관파천(俄館播遷)입니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하고 ‘파천’은 임금이 피란 가는 것을 말하지요.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고종은 다시 친러 내각을 만들고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 내각의 대신들을 처형하라 명했습니다. 김홍집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고 광화문 앞으로 나아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고종은 러시아의 힘 뒤에 숨어서 큰소리를 쳤습니다. 갑오개혁이나 을미개혁의 많은 부분을 무효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미처 치르지 못했던 왕비의 국장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나라의 권위와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지요. 어쨌든 이런 일들을 통해 고종이나 백성들은 부국강병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재필의 등장…개혁 바람

이 무렵 조선의 백성들을 계몽하여 근대 국가의 시민으로 만들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에 기초한 개혁을 이루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에 나선 대표적 인물은 서재필입니다. 서재필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만드는 일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독립협회의 ‘독립’은 중국으로부터의 자주 독립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외의 열강의 이권 침탈에서도 벗어나자는 의미도 갖고 있지요. 독립협회는 자주 독립, 자유 민권, 자강 개혁을 중요하게 내세웠습니다. 자주 독립은 우리나라의 독립권을 지키자는 것이고 자유 민권은 인민의 자유와 평등권을 확립하자는 주장입니다. 또 자강 개혁은 나라 안 정치를 혁신하여 잘 살고 튼튼한 나라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독립협회는 정부의 개혁을 건의하고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의회 설치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또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에게 궁궐로 돌아올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고종의 명령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고종은, 조선이 의회에서 만들어진 헌법으로 다스려지는 나라로 변화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전제 군주제 국가로 그대로 남아 있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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