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리처드 탈러 지음 / 박세연 옮김 / 리더스북 / 628쪽 / 2만2000원
파리 스티커가 붙은 남자 소변기, 피아노 건반이 그려진 계단, 빨간 선으로 진행방향이 표시된 도로…. 2009년 국내에서 출간된 《넛지(Nudge)》가 바꿔놓은 주위 풍경이다. 강제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소변기에 한발 다가서고,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오르며, 굽은 도로에서도 차선을 잘 유지한다. 요즘처럼 다원화된 세상에선 억지로 잡아끄는 강요나 지시보다 팔꿈치로 슬쩍 건드리는 넛지가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넛지》가 출간되자 당장 버락 오바마, 데이비드 캐머런 등 정치지도자들이 이 책에 꽂혔다. 미국 규제정보국, 영국 행동연구팀 등 넛지의 정책화를 위한 조직이 50여개국에 신설됐을 정도다. 브라질에서 택시 승객이 안전벨트를 매면 와이파이가 터지게 해 벨트 착용률을 높인 것도 그런 결과물이다.
세계에서 《넛지》가 가장 많이 팔린 나라는 한국(40만부)이다. 저자인 리처드 탈러도 깜짝 놀란 사실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휴가 때 읽었다 해서 공직사회에 선풍을 일으켰다. 넛지를 한국인의 일상어로 바꿔놓은 리처드 탈러가 7년 만에 신작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으로 돌아왔다. 원제는 ‘Misbehaving’이다.
이 책은 구성부터 독특하다. 행동경제학의 선구자인 저자가 40여년간 걸어온 학문 여정과 이론 형성과정을 자서전 형식으로 녹여냈다. 허버트 사이먼의 제한된 합리성으로 출발해 대니얼 카너먼의 전망이론 세례를 받고, 경제학자들의 공격에 신랄하게 반격해온 과정이다. 행동경제학 40년사(史) 겸 종합개론서쯤 된다. 특유의 위트 넘치는 문장과 에피소드가 가득해 570쪽이 지루하지 않다. 역시 ‘믿고 보는 탈러’다.
탈러는 1970년 대학원생 시절부터 경제학 이론에 삐딱한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경제학 모형 속의 호모 이코노미쿠스(이콘=경제적 인간)는 ‘아인슈타인처럼 생각하고, IBM 컴퓨터 같은 기억용량에, 간디처럼 의지력을 발휘하는 존재’다. 최적화만 생각하는 존재는 영화 ‘스타 트렉’의 스폭 박사 정도나 가능할 뿐이다. 현실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없다. 경제학자들조차 기회비용과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가는 돈을 동일시하는 데 애를 먹는다. 인간은 패턴화된 실수를 반복하고 종종 멍청한 선택을 한다. 그런 점에서 전통 경제학이 현실 문제에 무기력하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이를테면 경제학에선 1만원과 2만원의 효용 차이와, 100만원과 101만원의 효용 차이는 같다. 정작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없다. 효용(또는 손실)이 커질수록 민감성이 체감한다는 탈러의 설명이 훨씬 설득력 있다. 빈자와 부자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무차별 무상복지가 왜 문제인지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도박에서 돈을 딴 사람들은 베팅이 과감해진다. 마음속 심리계좌에 방금 딴 돈을 자기 돈이 아닌 ‘하우스머니’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이런 하우스머니 효과가 금융시장의 거품을 조장한다는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반대로 손실 상태에선 투자 전문가들조차 본전 만회 심리가 강해져 더 큰 손실을 유발할 수 있다고 탈러는 경고한다.
코스트코의 연회비는 성공했는데 메이시백화점의 정직한 가격정책이 실패한 이유도 흥미롭다. 연회비는 이미 지급된 매몰비용이지만 매번 싸게 산다는 거래효용감을 주는 사전 투자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에누리 없는 정직한 가격은 지갑에서 나가는 돈이 같다고 해도 효용감을 느끼기 어렵다. 이는 신라면 블랙은 배척되고 맛짬뽕은 대박이 난 현상을 연상시킨다. 신라면 블랙은 가격이 두 배로 올랐지만 맛도 두 배가 된 것은 아니기에 비싸다는 거부감을 유발했다. 반면 맛짬뽕은 완전히 다른 상품으로 인식돼 가격저항이 희석됐다.
이 밖에도 책 속에 제시된 무수한 사례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울한 과학’이라는 경제학이 어느덧 ‘유쾌한 과학’으로 탈바꿈한다. 그가 재직 중인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교수들이 방 배정 때 벌인 해프닝, 매출 부진에 빠진 작은 스키리조트를 살린 사례 등은 흥미진진하다. 말콤 글래드웰이 “학자 한 명과 엘리베이터에 갇힌다면 단연코 탈러를 선택하겠다”는 찬사가 빈말이 아니다.
물론 행동경제학이 전통경제학을 대체할 수준은 못 된다. 보완관계로 접근하는 게 좋다. 하지만 ‘모든 행동은 합리적’이라는 경제학의 대전제는 잘못됐다. 그렇다고 경제학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감소하는 것은 중력법칙과도 같다. 탈러가 강조하는 것은 경제학의 합리적 모형에 ‘인간’을 포함하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이콘들만 사는 가상세계에 집착해온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백기를 흔들게 될 것”이라고 끝맺을 만큼 도발적이고 도전적이다. 그런 점에서 탈러는 ‘경제학계의 도킨스’라고 부를 만하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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