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
외국계 CEO 대신 창업의 길로…화장품 '매출 1조' 기업 일궈
가난·좌절을 창업 에너지로
첫 직장서 지방대 설움 받자 "실력으로 승부하는 기업인 되자"
중소업체로 옮겨 경험 쌓아
'내가 사장이라면 어떻게 할까…' 말단 시절부터 CEO 훈련
국내업계 첫 ODM 방식 도입…국내외 500여곳에 제품 공급
[ 김희경 기자 ] 밤새 울고 나니 새벽이었다. 유학가는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부터 눈물이 흘렀다. 서러웠다. 공부하고 싶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이 고비마다 길을 막았다. 고등학교도 마음대로 택하지 못했다. 대학교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지방대를 가야 했다. 졸업 후에는 돈을 벌기 위해 농협에 취직했다. 하지만 승진, 연수에서 계속 명문대 출신에 밀렸다.
한꺼번에 밀려온 서러움을 눈물로 삭이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했다. ‘좋은 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부자가 아니어도 정상으로 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곧 답을 찾았다. ‘오직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일, 기업을 하자.’
1974년 일이다. 지방대 출신 한 농협 직원은 기업인을 꿈 袂?시작했다. 국내 1위 화장품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업체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 얘기다.
좌절은 사업의 원동력
윤 회장은 “어려운 환경과 그로 인해 부딪친 수많은 장벽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 됐다”고 했다. 그는 역사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 시험을 50여일 앞두고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담임 선생님은 생계를 위해 돈 벌 수 있는 과를 권했다. 영남대 경영학과를 나와 1970년 농협중앙회에 입사했다. 윤 회장은 “농협을 다니며 충분히 먹고살 수 있었지만 정신적 갈등은 늘 따라다녔다”고 했다.
1975년 농협을 떠났다. 기업인이 되려면 필요한 게 있다고 생각했다. 수업을 쌓을 곳으로 대웅제약을 택했다. 당시 대웅제약은 작은 업체였다. 대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지만 ‘작은 곳에 가야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 거절했다. 대웅제약 시절 그는 모든 결정을 내릴 때 한 가지만 생각했다. ‘내가 회장, 사장이라면 어떤 결정을 할까.’
대웅제약에서 15년간 일했다. 차장부터 부사장까지 여섯 번 승진했다. 윤 회장은 “내 회사라고 생각하며 일한 것이 사업할 때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윤 회장은 대웅제약 재직 시절을 “당장 눈앞에 보이는 (대기업이라는) 무대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현재의 욕망을 참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국콜마 본사엔 소 조각상 100여점이 있다. 윤 회장은 ‘우보천리(牛步千里)’를 자신의 경영 원칙으로 삼고 조각상을 모았다. “느리지만 우직한 소걸음으로 천 리를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너십이 아니라 일을 원했다
윤 회장은 1989년 외국계 제약회사로부터 최고경영자(CEO) 제안을 받았다. 거절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업을 시작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새로 시작할 사업을 찾기 위해 그는 주말마다 미국으로 갔다. 이곳에서 화장품 시장을 발견했다. 윤 회장은 “당시 국내 화장품산업은 규모가 작았지만 소득이 늘면 커질 것이라 확신했다”고 했다. 미국 유명 브랜드에 화장품을 납품하는 미국콜마를 찾아갔다. 기술을 제공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에 법인을 세울 계획이 없다며 거절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일본콜마가 한국 투자자를 찾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곧장 오사카로 날아갔다.
한국 진출을 준비하던 일본콜마는 지분 51%를 자신들이 갖겠다고 했다. 윤 회장은 오히려 일본콜마에 지분 80%를 가져가라고 제안했다. 일본콜마 측은 “다른 한국 기업인은 지분 51%를 고집하는데 당신은 왜 20%만 투자하느냐”고 물었다. 윤 회장은 “오너십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나는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일본콜마는 “한국이 아니라 미스터 윤만 믿고 투자하겠다”며 합작 제안을 받아들였다. 1990년 1월 윤회장은 일본콜마와 계약을 맺고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화장품 제조업을 시작했다.
ODM 전환으로 승부수
순탄치 않았다. 화장품 회사들은 세금계산서 없는 무자료 거래를 요구했다. 윤 회장은 거부했다.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기료도 못 뺨?상황에 놓였다. 한국전력에서 단전 통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윤 회장은 원칙을 지켰다. “직원들은 당분간만이라도 거래처 요구를 들어주자고 했다. 그러나 한 번 어기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원칙을 지키고 새로운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찾은 길은 ODM이었다. 당시 태평양, 한국화장품 등 주요 업체가 기획, 제조, 유통을 다했다. 한국콜마는 거래처가 주문한 대로 제조하기만 했다. 기술 개발은 꿈도 못 꿨다. 윤 회장은 결단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분부터 제조기술까지 개발해 화장품 회사에 제시하는 ODM 시스템을 갖추기로 했다.
1993년 한국콜마는 국내 화장품업계 최초로 ODM 방식을 도입했다. 기술력이 소문나기 시작하자 화장품 시장에 신규 진입한 대기업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윤 회장은 “ODM 전환은 사업을 확대하고 화장품 기술력을 높이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품질을 높이기 위해 의약품 제조관리 기준인 GMP(우수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도 화장품 업계 최초로 도입했다.
K뷰티 열풍 이끌며 세계적 업체로
2000년대 초 한국콜마는 또 한 번 성장했다. 국내에 미샤, 스킨푸드 등 브랜드숍(한 회사와 가맹점 계약을 맺고 그곳에서 제공하는 제품만을 판매하는 상점)이 잇따라 생겨났다. 윤 회장은 “이곳에서 화장품을 산 외국인 사이에서 한국 제품이 알려지며 K뷰티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높은 품질로 이름을 얻은 한국콜마는 급성장했다. 한국콜마로부터 화장품을 공급받아 판매하는 회사는 에스티로더, 아모레퍼시픽 등 국내외 500여곳에 달한다.
사업 영역도 확장했다. 2002년엔 제약, 2004년엔 건강기능식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윤 회장은 모두 연관산업이라고 했다. 그는 각 영역의 기술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화장품 연구원을 잇따라 제약 부문으로 보내고 있다. 윤 회장은 요즘 또 다른 계획을 세웠다. 진정한 글로벌 업체가 되는 것이다. 그는 “내년께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인 미국에 공장을 설립할 것”이라며 “글로벌 업체로 변신하겠다”고 밝혔다.
■ 한국콜마는
1990년 창업 후 급성장…화장품 ODM 강자로
한국콜마는 1990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업체다. 최근 중국에서 K뷰티 열풍이 불면서 세계적인 ODM 업체로 성장했다. 그룹 전체 매출은 2014년 826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엔 1조원을 달성한 것으로 내부에서는 보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등 국내 업체뿐 아니라 글로벌 화장품 업체와의 거래도 확대하고 있다. 최근엔 에스티로더와 계약을 맺고 자체 개발한 제품을 공급하기로 했다. 미국, 유럽, 일본 업체와만 거래하던 에스티로더가 한국에서 처음 공급받는 제품이다. 한국콜마는 이 밖에 록시땅, 코티 등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 윤동한 회장은
△1947년 경남 창녕 출생 △1970년 영남대 경영학과 졸업 △1990년 대웅제약 부사장 △1990년 한국콜마 설립 △2002년 제약산업 진출 △2004년 한국원자력연구소와 민관 최초 합작법인 선바이오텍 설립(현 콜마비앤에이치) △2007년 중국 법인 베이징콜마 설립 △2011년 국내 1, 2호 GMP(우수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 적합업체 지정 △2012년 정부 지원 월드클래스300기업 선정 △2014년 보건의 날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2015 대한민국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상 수상
김희경 기자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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