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한 주 간격으로 눈길을 끄는 서울대 교수팀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 구인회 교수(사회복지학과)의 ‘대학 진학에서의 계층격차: 가족소득의 역할’과 김세직·류근관 교수(경제학부)의 ‘학생 잠재력인가? 부모 경제력인가?’ 논문이 그것이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전자는 비슷한 성적대 학생도 가계소득 수준에 따라 대학 진학률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후자는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서울대 입학 확률을 높인다는 점을 각각 입증했다. 다른 변인은 통제하고 가정의 경제력을 잣대로 도출해낸 결론이다.
사실 ‘개천의 용이 사라진다’는 주장이 새롭지는 않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물음표는 진즉에 사라졌고, 마침표는 느낌표로 점점 더 바뀌어간다. 이젠 데이터베이스를 쌓아가며 담론을 재생산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의 확인 작업인 셈이다. 철 지난 유행어를 빌려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라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분히 따져보자.
교육사회학적 관점에서 교육은 계층이동을 담보하는 ‘믿음의 사다리’로 기능해왔다. 어떤 영향이나 제약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길을 개척해 성공(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믿음. 자유로운 개인이 능력을 발휘해 성공에 다다르는, 즉 개천의 용이 타고 오를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설계된 사다리가 교육이었다.
개인간 능력경쟁의 룰(rule)이 왜곡되고 교육사다리라는 합의에 균열이 가면서 이 믿음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사다리는 이미 올라간 누군가에 의해 걷어차였거나, 허공에 대롱대롱 간신히 매달린 형국이란 게 최근 서울대 교수들이 내놓은 논문의 골자다.
이같은 비판적 시각은 대체로 ‘교육이 오히려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불평등을 유지 또는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지적과 맥을 같이 한다.
우리사회로 돌아와 보면 개천용 담론의 실각과 ‘금수저·흙수저’의 등장은 개별적 사건이 아니다. 학자들은 둘을 맞물린 사안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민인식(경희대)·최필선(건국대) 교수는 중3 학생(2004년 기준) 2000명을 10년간 추적 분석한 ‘한국의 세대간 사회계층 이동성에 관한 연구’에서 “부모의 교육·소득 수준이 자녀의 계층이동을 결정한다”고 결론 내렸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계층상승 기회가 제한되는 ‘닫힌 사회’로의 변화를 젊은층이 한층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건 무리가 아니다. 부모 세대에게는 자수성가 경험담과 개천용의 추억이 남아있다. 반면 젊은 세대는 구조적으로 부모 지원 없이는 결혼과 자녀 양육 같은 일상조차 실현하기 어려워졌다. 그로 인한 열패감이 수저계급론으로 귀결된 셈이다.
개개인에게 하늘이 감동할 만큼 노력해봤느냐고 묻기 전에 지금 한국사회가 과연 얼마나 ‘열린 사회’인지 자문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한 서울대생이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두뇌)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란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한 사건은 매우 상징적이다. 해서 열린 사회로의 터닝포인트는 능력보다 경제력으로 사다리를 결정하려는 개입과 왜곡 시도를 차단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새삼 정색하고 달려드는 게 설령 ‘아마추어’ 같아 보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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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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