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37)
(34) 왕의 아버지가 정치를 대신하다
(35) 최초로 근대 국가를 시도하다
(36) 이 땅의 주인은 농민이다
(38) 일제에 외교권을 뺏기다
(39) 진정한 동양 평화를 위하여
오늘날 덕수궁(경운궁)에서 약 500미터 정도 걸어가면 조선 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의 즉위식이 치러집니다. 더 이상 청 황제의 제후국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임을 선포하고 고종 황제는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조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이에 근대적 입헌 체제를 수립한 제국, 대한제국이 있었습니다.
근대적 개혁 군주를 자처한 고종 황제
당시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조선은, 그리고 고종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있었던 을미개혁, 그리고 당사자인 고종 자신의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것까지,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풍전등화와 같은 날들이었지요. 독립협회는 물론 전 현직 관료들조차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국임을 선포해야 한다는 호소와 주장이 계속해서 고종에게 올라왔습니다. 결국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중대한 결단을 하게 됩니다.
단, 이 과정을 저는 고종의 시선으로 한 번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당히 상황에 떠밀려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아관파천 당시인 1896년 고종은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보냅니다.
또한 다음해인 1897년 민영환을 영국대사로 임명하고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행사에 참석케 합니다. 제정 러시아는 여전히 황제권이 막강했지요. 영국은 이미 의회 중심의 내각책임제를 기반으로 하는 입헌군주제가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었지요. 이 두 가지 경우를 고종은 민영환을 통해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미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적 입헌 체제를 수립하고 팽창주의적인 대외 정책을 쓰고 있었고 직접적으로 우리나라를 겨누고 있었으므로 이제 고종은 어떤 식으로든 나라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고종의 선택은 제정 러시아를 상당히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식은 아니었지요. 그래서 고종이 근대적 개혁 군주로 자임하며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통해 점진적 개혁을 추진합니다. 1899년 원수부를 설치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 무관학교를 재설립하였으며 장교 양성 기관으로 변화시켜 나갔지요.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양전 사업과 토지 소유권을 명시한 지계를 발급하여 재정 수입 확대와 근대적 토지 소유권 확립을 이뤄 나갑니다. 또한 식산흥업 정책을 통해 근대적 산업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황실이 직접 경영하는 방직공장이나 유리 공장 등을 시도하였으며,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전차가 다니게 된 것도 이 시기이지요.
물론, 대한제국의 개혁이나 근대적 체제 수립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것이 독립협회와의 갈등이지요.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이 친러파에 기우는 것보다 좀 더 자주적인 국정 운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서구식 의회 설치를 주장하면서 대한제국의 국정 방향과 부딪치게 됩니다.
대한제국의 헌법, 대한국 국제
구본신참의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하던 고종과 정부 관료들에게 독립협회가 주장하는 시민권과 이를 대변하는 의회 설립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한때 대한제국 관료 중에서도 주미공사를 지냈던 박정양이 중심이 된 내각과 우호 관계를 통해 헌의6조를 채택하고 서구식 의회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는 중추원의 관제 개편과 중추원 의장의 권한 확대까지 합의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세력과 고종의 동조로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독립협회는 해산되기까지 합니다. 그 뒤 반포되는 것이 ‘대한국 국제’입니다.
1899년 淪畸?국제는 9조로 구성되어 있는 대한제국의 헌법입니다. 제1조에서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 제국임을 선포하고 제2조와 3조에서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이자 황제의 무한한 군권을 규정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황제가 군 통수권부터 입법 행정 사법권의 모든 권한을 가진다고 명문화하였지요.
이렇게 근대적 제국을 선포한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는 황실 중심의 개혁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간섭과 이권 침탈은 심심찮게 이어지고 있었고, 근대적 개혁은 그 성과가 그리 크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더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참여가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 역사는 너무나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1904년과 1905년에 걸쳐 일어난 러·일 전쟁으로 대한제국의 운명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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