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테랑'은 기업인을 너무 매도했다
반기업정서 이렇게 확산시키면 누가 창업에 나서겠나
종업원과 함께 일군 회사, 아무리 아들이라도 엉망이라면 물려줄 수 없어
기업인은 다 이런 생각으로 경영
[ 김현석 기자 ]
“지난 주말에 영화 ‘베테랑’을 봤습니다. 보고 나서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기업을 창업해서 어떻게 키워왔는지를 얘기하며 잔뜩 상기됐던 그가 갑작스레 목소리를 더 높였다. 저녁식사를 하다가 최근 본 영화 이야기가 나와서였다. 한마디로 기업인을 너무 매도한 것에 화가 났다는 얘기였다. “이런 식으로 반(反)기업 정서를 확산시키면 누가 창업에 나서겠느냐”고도 했다. 그는 60대 초반의 중견기업 오너다. 작은 회사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하다 20여년 전 창업해 연 매출 5000억원대의 기업을 일군 창업 1세대다.
“그 영화는 나처럼 평생을 바쳐 기업을 일궈온 기업인을 일방적으로 매도했습니다. 기업인은 나쁘다는 전제를 깔고 있더군요.” 한숨을 몰아쉰 그는 언성을 높였다. “지난 20여년을 돌아보면 물론 돈 버는 게 목표였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죠. 나 혼자 잘먹고 잘살려면 잘나갈 때 사업체를 팔았겠지요. 하지만 이게 제 회사입니까. 회사를 키워온 직원들과 같이 먹고살려고 그렇게 뛰었습니다.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면 한 1만명은 될 겁니다. 그리고 나름대로는 어려웠던 나라를 위해 애국하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베테랑’은 지난 7일까지 누적관객 수 1337만명을 넘기며 한국영화 역대 흥행 3위를 차지한 영화다. 특수강력반 형사 서도철(황정민 분)이 살인을 저지른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 분)를 결국 구속시킨다는 줄거리다. 영화 속 조태오는 마약파티를 즐기며 임신시킨 여배우를 폭행하는 인물이다. 자기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트럭기사를 때려 사경을 헤매게 하고 서도철이 뒤쫓자 “나한테 이러고 뒷감당할 수 있겠어요?”라고 조롱한다.
조심스럽게 “일탈한 재벌 2세도 가끔 있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자 강한 반발이 돌아왔다. “저도 아들이 있지만 엄청나게 통제하며 키웁니다. 돈도 잘 안 줍니다. 자식이 가장 큰 ‘리스크’니까요. 내가 종업원들과 피땀 흘려 일해 일궈놓았는데, 아무리 아들이라도 엉망이라면 회사를 물려줄 수 없지요. 기업인이라면 다 그런 생각으로 자식을 키웁니다.”
그는 갑자기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금 여기에 돈이 꽤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돈을 맘대로 쓴 적이 없습니다. 우선 쓸 시간이 없어요. 휴가도 간 적이 별로 없고, 휴일에도 맘놓고 쉰 적이 많지 않습니다. 쉬는 날에도 일하는 직원들이 있는데 내가 나가서 밥도 사주 ?그래야지 어떻게 쉬겠습니까.”
최근 한국엔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는 영화와 드라마가 자주 만들어진다. 지난주 개봉한 영화 ‘성난 변호사’에서는 한 제약회사 사장이 임상시험에서 부작용이 나타난 관절염 신약을 팔기 위해 비밀을 아는 사람들을 청부 살인하는 모습이 나온다. 또 SBS가 최근 방영한 드라마 ‘용팔이’는 재벌 2세 이복남매 간 상속 싸움이 주요 테마다. 이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기업인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돈을 위해서라면 거리낌없이 살인까지 하는 냉혈한이다.
이 기업인은 “영화를 보고 잠을 못 잔 건 억울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미래가 걱정돼서입니다. 이 영화를 본 1000만명 이상이 은연중에 반기업 정서를 가졌을 게 아닙니까. 젊은이들이 창업하고 도전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누가 기업을 하겠습니까. 그럼 일자리는 어디서 생기고 세금은 누가 내겠습니까.”
다시 사업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열변을 토했다. 밤 10시 반이 돼서야 “지금 공장이 있는 지역에 법인세를 많이 내 납세 1위가 되는 게 목표”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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