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포트
미국 미시시피강 가득 메운 일본·중국 곡물운반선…한국은 '구경꾼'
미국 미시시피강 저장선 빼곡…일본이 10대 중 1대꼴 보유
한국 곡물회사는 4년전 파산
뉴올리언스·디모인=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 고은이 기자 ]
중국과 일본 기업들이 국제곡물시장 투자를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다. 대표적 원자재인 곡물 조달 능력이 미래 경쟁력을 가를 것이라고 판단하면서다. 한국은 정부 주도의 곡물 조달사업이 2013년 실패로 돌아간 뒤 관련 사업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지난 17일 찾은 미국 뉴올리언스 미시시피강 하류엔 미국 전역에서 곡물을 싣고 온 배와 이 곡물을 세계 각국으로 운송할 대형 선박이 강을 꽉 채우고 있었다. 1만8000t급 배 수천척이 곡물 메이저들이 소유한 대형 수출 엘리베이터(곡물 저장창고)에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이곳 엘리베이터 10기 중 1기는 일본 농협인 젠노가 보유하고 있다. 이 엘리베이터의 곡물 보유 용량만 10만8000여t, 한 시간에 6400여t의 곡물을 실어나를 수 있다.
김학수 미국곡물협회 부대표는 “일본은 일찌감치 곡물 조달사업의 중요성을 인지했고 최근 엘리베이터를 더 확충해 조달 능력을 키웠다”며 “젠노가 보유한 산지 엘리베이터는 60여개에 달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정부 주도로 1500조원 규모의 국제곡물시장에 뛰어들었다가 엘리베이터 확보조차 못해 사업을 접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부는 2011년 ‘한국형 카길(미국 곡물회사)’을 목표로 미국에 곡물조달전문회사를 세웠지만 콩 1100t만 들여온 뒤 파산했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당시 곡물가격이 이미 오른 상태라 엘리베이터 가격도 급등해 쉽게 구입할 수 없었다”며 “곡물 조달 필요성은 누구나 알지만 현실적인 시장 진입방안을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미쓰비시·마루베니 등 日상사들도 곡물사 인수
中은 100억달러 투입…곡물사 인수합병 나서
2011년 뒤늦게 뛰어든 한국, 제대로 준비 못 해 실패
한국이 세계 곡물시장 진출을 망설이는 사이 중국도 곡물 조달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국영기업인 중국곡물식품공사(COFCO)는 지난해 네덜란드 대형 곡물업체인 니데라를 인수했다. 홍콩 노블그룹과 합작해 곡물전문회사도 설립했다. 미국 곡물검사업체 러셀마린그룹의 아벨 토닝 매니저는 “곧 파나마운하가 확장 개통하면 중국 업체들이 무섭게 들어올 것이란 얘기가 현지 업체들 사이에서는 이미 파다하다”고 말했다.
국제 곡물조달 분야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은 젠노나 COFCO 같은 곡물전문회사뿐 아니다. 일본 종합상사들도 앞다퉈 전 세계 곡물회사를 인수하고 있다. 마루베니는 미국 내 곡물저장능력 3위 업체인 가빌론을 사들여 연간 곡물 취급 규모를 2500만t에서 4500만t으로 확대했다. 브라질 세아그로 지분 80%를 확보한 미쓰비시, 브라질 멀티그레인을 인수한 미쓰이도 있다.
중국은 곡물 부문 인수합병(M&A)에만 100억달러를 쏟아붓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연 5000만t인 곡물가공 처리 규모를 7700만t까지 올리겠다는 목표다.
중국과 일본이 앞다퉈 세계 곡물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이유는 앞으로 곡물 확보·저장 여력이 중요해질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한국은 옥수수의 99.2%, 밀의 99.3%를 수입한다. 만약 큰 가뭄이나 투기자본 유입 등으로 국제 곡물가가 오르면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 수출국들이 자국 수요 충족을 위해 수출을 통제하거나 곡물 메이저들이 가격 유지를 위해 보유한 곡물을 풀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과거 곡물 파동이 일어났을 때 한국 정부는 곡물메이저와의 협상에서 국제 시세의 2.5배에 달하는 돈을 주고 곡물을 사들여온 전례도 있다.
하지만 한국은 국제 곡물조달에 손을 놓고 있다. 2011년 곡물자급률을 55%까지 높이겠다며 야심차게 출발한 국제곡물시스템 구축 사업은 시작 3년 만에 중단됐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와 삼성물산 STX 한진그룹 등 민간 3개기업이 합작해 ‘aT그레인’이라는 곡물조달 전문회사를 세웠지만 이미 성숙된 시장인 미국 곡물 시장을 뚫기엔 역부족이 駭?것. 당시 aT그레인 설립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국제 곡물 조달 과정은 이미 200여년 전 형성, 고착돼 일반 시장과는 성격이 다른데 여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 무작정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예고된 실패’였던 셈이다. 관련 예산 642억원은 10기의 산지 엘리베이터와 1기의 수출 엘리베이터 지분을 사기 위한 인수대금이었지만 결국 1기도 사지 못했다.
한국도 장기적으로 곡물조달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곡물 전문가는 “그동안 정부 주도의 곡물조달 시스템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 건 단기 성과에만 매달린 탓”이라며 “자체 곡물 수입을 소규모로 시도해본다는 생각으로 현실적인 조달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곡물 엘리베이터
농부로부터 밀이나 콩 등을 사들인 뒤 건조, 분류, 저장하는 거대한 곡물 창고다. 보통 강이나 철도 등 운송시설 인근에 있다. 위치와 역할에 따라 산지·강변·수출 엘리베이터 등으로 구분된다.
뉴올리언스=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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