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전(戰前) 일본 정치에 대한 아베의 비판은 평가받을 만
대한민국 해방과 성장의 70년
우방국에 감사의 표현 없었던 점은 아쉬워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조용한 마음으로 20세기를 되돌아보며…”로 시작되는 아베의 담화에는 고뇌의 흔적이 역력하다. 수용과 배척은 각자의 몫이지만 복잡한 심사만큼은 충분히 전달됐다고 본다. 솔직하고 정중한, 그러나 충분히 도전적인…! 아베다운 문장이었다. 전전(戰前) 일본의 오류에 대한 시인은 매우 솔직해서 일본 내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일본이) 국제사회가 엄청난 희생 위에 구축하려고 했던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자가 되어 갔다”거나 “힘의 행사로 문제를 풀려는 시도를 국내 정치가 제어하지 못했다”는 등의 평가는 무라야마 담화에서는 보기 어려웠다. 식민지배(한국)와 침략(중국)에 대해 좀 더 분명한 반성과 사과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일본 자신에 대한 평가는 진일보였다. 무라야마 담화가 원인 결과에 대한 설명 없이 식민지배와 침략을 사과한 것에 비하면 반성문의 형식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전개다. 전쟁으로 치달 ?갔던 경과가 아베 담화에 그렇게 새로 포함됐다. 물론 자기변명이나 합리화 시도라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앞으로의 행동이 증명할 것이다.
담화의 분량이 길었다. 긴 설명은 진실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진실을 가리기 위한 레토릭일 수도 있다. 그 점은 아쉬웠다. 아시아 아프리카 국민들이 모두 환영했다는 러일전쟁 평가도 그런 대목이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장면이었다. 러일전쟁 시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조선 침략은 교묘하게 부인될 수도 있다.
아베가 담화를 발표한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70주년 경축사가 발표됐다. 일본에 대한 격앙된 목소리를 자제했다는 면에서는 다행이었고 전례답습을 면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만족스런 축사는 아니었다. 경축사의 첫 문단부터가 그랬다. 대통령은 “70년 전 오늘 우리 민족은 독립을 향한 열정과 헌신적인 투쟁으로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이뤄냈다. 순국 선열의 불굴의 의지와 애국심은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한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인 진실일 뿐이다.
70주년을 맞은 식민지 조선의 해방은 미국 등 연합국이 승리한 결과였지 우리 내부의 투쟁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이승만 등 극소수의 선각자를 제외하면 그것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예상을 벗어난 사건이었다. 이후 3년 동안 치열한 건국 과정이 있었지만 8·15해방 그 자체는 연합국 승전의 결과였다. 자유주의가 전체주의에 대한 세계사적 승리를 거뒀고, 그 이후에도 미국과 혈맹 체제를 유지한 것이 한국인에게 큰 축복이었다는 것이 언급됐더라면 좋을 뻔했다. 대통령이 언급한 70년 동안의 기적 걋?성공도 한국이 자유의 진영에 속했다는 것, 미국 등 우방국들의 호응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게 진실에 가깝고 더구나 세계에 대한 예의다. 역사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처럼 우연적 축복도 있는 법이다. 오로지 우리 노력으로 해방됐다고 말한다면 세계가 속으로 비웃을 수도 있다. 독립투사들의 간난신고에 감사하는 마음과 자유의 동맹국들에 감사를 표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 협정은 일본의 패배를 확정하는 협정이었지만 한국이 그 승전국 명단에 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적시한다고 해서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폄하되는 것도 아니다.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자력 쟁취로 바꿔 말하는 것은 더 부끄러운 일이다. 아픈 역사를 반성할 수 있어야 기적 같은, 그리고 위대한 성취를 자랑할 수도 있다. 우리가 구한말의 그 특정 시기를 대한제국이라고 높여 부르거나 고종황제라고 부를 때 언어의 허무함을 느끼는 것도 그래서 아니겠는가. 보잘것없는 출발이었으나 이미 충분히 자신의 성공을 자랑할 만한 국가로 성장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더 이상 무슨 레토릭이 필요한가. 대한민국의 해방과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 세계의 우방에 감사를 표시하는 것은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성숙한 국가라면 그래야 한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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