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미 기자의 경제 블랙박스
한국은행 직원들, 버려진 日공사관 자료서 '뿌리찾기'
[ 김유미 기자 ] 한국 중앙은행의 역사를 책으로 쓴다면 그 첫 장은 어떨까. 시작은 제일은행이었을 것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상업은행인 제일은행에 화폐 정리와 국고금 취급 일을 맡겼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조선은 이미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 같은 서술을 안타까워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은 법규제도실의 한 관계자는 “일본 은행의 경성 지점이 한국은행의 전신(前身)이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이들은 과거 중앙은행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꼭 찾아낼 것 목록에 ‘대한중앙은행’ 이름이 있었다. 대한제국이 설립하려던 중앙은행. 하지만 ‘실체가 없다’는 비판 속에 역사 서술의 외곽으로 밀려나곤 했다.
대한중앙은행 이야기는 2010년 한은이 발간한 ‘한국은행 60년사’에 짤막하게 나온다. 19세기 말 여러 외국돈이 들어오자 조선은 1883년 전환국을 설치해 화폐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다. 별 소용이 없었다. 영향력을 확대한 일본은 제일은행을 통해 은행권을 내놓기까지 했다.
일본에 통화주권을 뺏길 수는 없었다.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은 1903년 ‘중앙은행 조례’를 내놓는다.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인 ‘대한중앙은행’을 설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총재와 부총재까지 임명했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경제권은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일본은 ‘한국은행(지금의 한국은행과 구별하기 위해 ‘구(舊) 한국은행’이라고 한다)’을 설립해 제일은행의 발권 업무를 넘겼다. 임직원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한일 강제 병합 후 1911년엔 ‘한국’이란 말도 쓸 수 없었다. 구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일본의 침략자금 공급을 맡는다. 이처럼 어두운 역사 때문에 조선은행은 해방 이후 청산을 맞는다. 1950년 미국식 제도에 기반한 지금의 한국은행이 설립됐다.
중앙은행의 역사를 대한중앙은행으로 시작할 수는 없을까. 자주적으로 추진된 최초의 중앙은행 아닌가. 하지만 실현된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한은에서도 그 실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은 직원들이 자료 발굴에 매달린 배경이었다.
이들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중앙은행 조례’ 원본을 찾아냈다. 첨부된 ‘태환금권조례’에선 1환, 10환 등 5종을 발행하고, 중앙은행은 같은 금액의 금화나 금괴를 보유하도록 했다. 금본위제다. 함께 찾아낸 ‘화폐조례’는 1901년 고종이 공포한 칙령이다. 화폐의 제조와 발행이 정부의 권한임을 명시했다.
최대 성과는 대한중앙은행의 정관을 찾은 것이었다. 대한제국이 작성했다고 추정됐지만 원본이나 사본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한은 직원들은 일본 공사관에서 그 일본어 필사본을 발견했다. 한은 관계자는 “대한중앙은행이 추진됐을 때 일본 공사가 반대 의견을 냈는데 당시 내부 검토자료를 통째로 찾았다”며 “일제 패망 직후 버려져 쌓여 있던 자료”라고 설명했다. 완전하진 않지만 대한중앙은행의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지난 5월 한은이 발간한 ‘한국은행법 제정 자료집’의 제1장은 대한중앙은행이다. 이번에 찾아낸 자료들이 실려 있다. 총 60쪽이니 많지는 않다. 그래도 가려져 있던 역사가 첫 장을 장식했다는 점에서 직원들은 뿌듯해했다.
대한중앙은행의 한계는 명확했다. 고종은 일본에 맞서 러시아 세력에 기대고자 했다. 대한중앙은행이 무산된 것은 러일전쟁 뒤 친러파가 축출된 데 따른 허무한 결과였다.
광복 70년, 발굴할 역사는 아직 많다. 자료집은 한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김유미 경제부 기자 warmfron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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