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유로존
대외상황 따라 춤추는 경제
2008년까지 가입국 승승장구…미국 금융위기 이후 곤두박질
화 키운 주범은 단일 통화정책
ECB, 남유럽 거품에 대응 못 해…독일·프랑스 등 강대국 눈치본 탓
"구제금융만으론 극복 힘들다"
개별 국가중심주의 넘어야…해결 열쇠는 독일 손에
[ 임근호 기자 ] 화폐·경제 통합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폴 드 그라위 영국 런던정경대(LSE) 교수는 1999년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 출범 때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은 아름답지만 지붕이 없는 저택”이라고 비유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괜찮지만 비가 오면 엉망이 될 것이란 경고였다.
▲여기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라위 교수의 경고가 유로 출범 16년 만에 현실화하고 있다. 그리스가 국제통화기금(IMF)에 대한 15억유로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고 유로존 탈퇴 여부를 거론하면서 불안한 체제 안정성에 대한 지적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로존 경제 2008년이 정점
비판이 있긴 하지만 유로존 출범이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2008년까지 유로존 국가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1999년 1월4일 외환시장에서 처음 거래될 때 유로당 1.17달러였던 유로화 가치는 2008년 4월22일 1.60달러로 올랐다. 달러를 제치고 세계 기축통화가 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11개국이던 유로존 회원은 2001년 그리스, 2007년 슬로베니아, 2008년 키프로스와 몰타 등으로 확대됐다. 유로존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1999년 미국 대비 73.9%에서 2008년 97.9%까지 올랐다.
이런 긍정적 효과는 환율 안정성 덕이었다. 환율 변동에 대한 불확실성이 없어 유로존 안에서의 상품과 서비스 거래, 투자가 활발해졌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유럽 통합의 필요성을 공감해왔던 유럽국가 입장에서 국경을 넘어선 교류와 투자는 반드시 필요했다. 유로화는 정치·경제 구조가 취약한 국가의 기업에도 득이 됐다. 정치·경제가 다소 불안해져도 유로화를 쓰는 덕분에 환율이 요동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8년이 정점이었다.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비가 내리자 유로존이라는 집은 금세 엉망이 됐다. 유로존에 가입해 있어 싸게 자금을 빌려 썼던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서 부실이 터지면서 위기가 현실화됐다.
이런 문제의 대응시스템도 없었다. 요즘 뉴스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유럽재정안정기금(EFSF), 유럽안정화기구(ESM) 같은 장치 모두 2010년 유로존 위기가 본격화한 뒤 만들어졌다.
단일 통화정책에 발 묶여 거품 키워
유로존은 이들 기구를 통해 긴급자금 지원으로 급한 불을 껐다. 그러나 잔불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스는 유로존 탈퇴로 협박하며 채권단과 위험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도 언제 ‘제2의 그리스’가 될지 모르는 상태다.
그라위 교수는 “유로존 위기의 원인은 출범 때부터 내재됐던 구조적인 문제에 있다”고 진단했다. 살림살이 상황이 다른 여러 나라를 하나의 화폐경제 안으로 몰아넣은 것 자체가 큰 리스크라는 지적이다.
그리스는 애초 유로존에 가입하기 힘든 나라였다. 1999년 유로존 가입을 거절당한 것도 요건이 맞지 않아서였다. 세금은 적게 걷히는 데 지출은 많았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그리스는 한 번도 재정수지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
반면 독일은 매년 큰 폭의 재정흑자를 내는 나라다. 이들을 한집안에서 한 가지 화폐를 쓰도록 한 모험은 큰 부작용을 낳았다. 가장 큰 게 부채 급증이었다. 상대적으로 경제구조가 취약했던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도 손쉽게 자금을 빌릴 수 있게 됐다.
유로 출범 전인 1990년대 초 유로존 회원국 간의 10년물 국채 수익률 격차는 12~13%포인트였다. 하지만 유로화 도입 후 격차가 1%포인트 미만으로 줄었다. 2002~2007년 그리스 국채 수익률은 연 4.32%, 스페인은 연 4.10%였다. 독일이 연 4.07%였던 때다. 강유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유럽팀 연구위원은 “아일랜드와 스페인에서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고,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그리스에서는 대외 채무가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유로존 국가가 단일한 통화정책에 묶인 것도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중앙은행은 호황기에 기준금리를 올려 거품을 예방하고, 침체기에는 내 ?경기를 활성화한다. 하지만 유럽중앙은행(ECB)은 남유럽 국가에서 발생한 거품에 금리를 올려 대응하지 못했다.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의 경제사정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로존 기로에 섰다
결국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아일랜드와 남유럽 국가의 거품이 꺼지면서 유로존 위기가 현실화했다. 투자자들은 스페인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의 국채를 투매했고, 이들 국채를 갖고 있는 현지 은행들의 재무건전성도 급격히 나빠졌다. 은행을 살리기 위해 정부자금이 투입되면서 국가 부채는 걷잡을 수 없이 급증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유로화에 따른 장점이 분명 있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유로존이 지속될 수 없다는 점 또한 명확해졌다”고 분석했다. 유로존 개혁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현안이 됐다는 지적이다.
유로존 개혁에서 가장 큰 난관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개별국가 중심주의가 꼽힌다. 많은 전문가는 유로존 위기를 해소하려면 과감한 부채 탕감과 적극적인 재정·통화정책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IMF도 최근 그리스에 부채 탕감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해결 열쇠를 갖고 있는 독일 국민은 그리스 등 문제 국가에 자신들의 돈을 쓰는 것을 거부한다. 강 연구위원은 “유로존 위기는 구제금융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며 “은행 동맹이나 재정·정치 통합 등 보다 높은 차원의 통합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