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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병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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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역사읽기) “정원사가 손에 흙이 묻은 걸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듯, 의사는 손에 묻은 피와 고름을 더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오랫동안 산부인과 의사들은 산모들의 사망원인 1순위로 꼽히는 산욕열로 부터 해방되기를 바랐다. 이와 관련해 1847년 부다페스트 출신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라는 독일계 의사가 너무나도 간단한 처방책을 제시했다. 바로 “의사들이 손을 씻으라”는 것이 그 대책이었다.

그의 조언을 따른 병원에선 산욕열 사망률이 18%에서 1%로 줄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가 한 조언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대부분의 병원에서 채택되지 않았다.1850년대 까지도 의사와 간호사들은 제멜바이스의 충고를 공개적으로 무시했고, 산모들은 끊임없이 죽어나갔다.

제멜바이스의 처방이 이처럼 의사세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난해한 의학적 철학 내지 고집 때문이었다. 바로 의사들이 병을 옮기는 존재일리 없다는 자신감과 “정원사가 손에 흙이 묻은 걸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듯 의사는 손에 묻은 피가 더럽지 않다”는 당시의 신념이 손 씻기 보급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병원도 이런 측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줄리. 펜스터에 따르면 제네바 병원에서 직원들이 평소 손 씻는 비율은 48%에 불과하고, 듀크대 의대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버지니아대 통계에 따르면 병원내 감염이 전체 사망원인중 심장병, 암, 뇌졸중, 폐렴·인플루엔자에 이은 다섯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병원들은 어느 정도일까?)

앞서 제멜바이스가 손 씻기 ‘비급’을 발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세계 최고의 설비를 갖췄다는 빈의 종합병원인 ‘알게마이네 크랑켄하우스’에선 산부인과 진료가 두 군데서 나눠져 진행됐다.

하나는 남자 의과대학 학생들이 진찰과 진료를 하는 제1병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성 조산원들이 진료와 진찰을 하던 제2병동 이었다. 커다란 강당을 사이에 둔 두 병동은 동일한 치료법을 사용했는데 제1병동의 사망률이 제2병동에 비해 세배나 높았다. 두병동간 산욕열 발병율의 차이가 비정상적으로 커서 산모들의 생존율이 극명하게 갈린 것이다. 의사들은 당시 과학의 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저주의 힘이 제1병동에 작용한다고 믿었다. 제2병동을 배정받은 산모들은 미소를 띠며 병동으로 걸어갔지만 제1병동을 배정받은 산모들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쥔 채 2병동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미생물이란 게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미생물이 위험한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당시 의사들은 발병환자 절반이상이 죽는 산욕열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병의 발병원인에 대한 이론도 제각각 이었고,교수도 학생도 모두 혼란스러워했다.

또 당시 의료 환경에선 신체 조직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체의 일부가 찢어지고 갈라져 피가 수술실 주변으로 줄줄 흘러도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환자들의 피가 튄 옷과 가구, 마룻바닥과 의사들은 최소한 하루 동안은 그런 상태를 방치했었다.

이 같은 이유로 의사의 더러운 손이 산욕열을 전염시킨다고는 아무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고, 따라서 산욕열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나 간호사들 중에 자신의 몸과 옷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멜바이스는 1병동과 2병동 사이의 차이점을 찾으려 동분서주했다. 그러던 중 그가 주목한 것은 미숙아를 낳은 산모들의 산욕열 발병률이 낮다는 점이었다. 병원에 오던 도중 아이를 낳은 산모들의 경우, 산욕열에 걸린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빈의 최하층 여성들의 경우,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 했지만 대부분 침대를 배정받지 못하고 병원 마당이나 복도에서 출산했는데,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병원 침대를 피하는 순간 산욕열도 피했다. 산욕열은 병원과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때마침 제멜바이스의 동료의사가 산욕열로 죽은 환자의 시체를 검시하다 칼에 베였고, 산욕열과 유사한 증상으로 죽었다. 아직 박테리아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은 때였지만 이를 목도한 제멜바이스는 “의사가 시체를 만지다 산모에게 가서 진료를 하는데 사체에 속해있던 어떤 물질이 산모의 혈관으로 흡수돼 산욕열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결국 ‘사체의 물질‘이라고 이름붙인 미지의 물질이 산욕열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1병동과 2병동의 사망률 차이의 원인이 명확해졌다.

1병동에선 남자 의사와 의과대학생들이 산욕열로 인해 사망한 사체를 검시하지만,2병동 여성 조산원들은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의과대학생들은 검시를 하다가 손도 제대로 씻지 않고 곧바로 환자를 진료하는 게 당시의 관행이었다.

이에 따라 1847년 제멜바이스는 학생들에게 산부인과 병실에 들어가기 전에 소독세제로 손을 철저하게 씻으라고 지시하기에 이른다. 염소를 첨가한 석회수에 무조건 손과 장비를 깨끗하게 씻도록 한 것이다. 손을 깨끗하게 씻자는 제멜바이스의 지시가 제대로 지켜진 1848년 제1병동의 산욕열 발병률은 1.27%로 줄어들었다.1846년의 11.4%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손 씻기 비급은 당시 의사들에게 철저하게 거부당했다. 19세기 초 의사들은 사체의 물질이 자신의 손에 묻어있는 것을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명예로운 훈장으로 여겼다. 솜씨 좋은 정원사가 손에 흙이 묻은 걸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태도였던 것이다. 여기에 자신이 최고라고 여겼던 의사들이 바로 자신이 병을 옮기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래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세균감염을 알지 못했던 의학지식으로는 병은 땅이나 다른 원천에서 서며 나오는 독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원장선생님 눈 밖에 난 제멜바이스는 1849년 좌천됐고, 후임자는 손 씻는 규칙을 폐지해버렸다. 제멜바이스는 이후 계속 한직을 돌다 마침내 1850년에는 해고돼 동료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제멜바이스는 빈에서 쫓겨난 지 10년 후 자신의 주장을 설파한 책을 썼는데 거의 읽히지 못했고, 첫 영어 번역이 나온 것은 백여 년이 지난 1983년이라고 한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데다가 실행에 옮기기 쉬운 최신 치료법이었던 손 씻기는 이 같은 이유로 오랫동안 배척되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자??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확산일로에 있는 메르스 사태를 보면서, 확진자 대다수와 사망자 전부가 모두 ‘병원에서 감염됐다’는 공통점이 보였다. 실제 초기 메르스 확산은 메르스인지를 모른 의료진이 같은 병원내 여러 환자를 치료하다가 발생한 것이라는 추론이 힘을 얻고 있다. 150여 년 전 병원이 병을 키웠던 사례가 꼭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몇 자 끼적여 봤다./증권부 김동욱 기자(끝)

***참고한 책***

줄리 M.펜스터, 『의학사의 이단자들-현대 의학을 일군 개척자들의 열정과 삶』, 이경식 옮김, 휴먼북스 2004

로이 포터, 『의학콘서트』, 이충호 옮김, 예지 2007

제컬리 더핀, 『의학의 역사』, 신좌섭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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