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모 출판사에서 발간된 <솔로강아지>라는 시집이 여러 사람들 사이에 화제로 떠오르며 작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문학 작품이 여러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음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논의의 방향이 자칫 '마녀사냥'식으로 흐르거나 흑백논리로 나아가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논점을 정확하게 짚어야 한다는 뜻이다.</p>
<p>자세히 살펴보면 '잔혹 동시'라는 프레임 자체에 문제가 있다. 필자가 살펴본 <솔로강아지>에 수록된 작품들은 '동시'가 아니라 그냥 '시'로 분류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잔혹 동시'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p>
<p>물론 그런 빌미를 제공한 곳이 해당 출판사임은 분명하다. 책을 펴내면서 '동시집'이라고 규정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문제를 삼자면 바로 그 지점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p>
<p>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가보자. 우선 우리가 '시'와 '동시'를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명확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p>
<p>간단히 정리하자면 원래는 '시'만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에게 읽히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과 적합한 것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TV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면 '19세 이상 시청 가능' 혹은 '전체 관람가'라는 등급이 존재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러한 차 隔?바로 '시'와 '동시'를 가르는 시작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이었다"라고 과거형을 쓴 이유는 '동시'라는 개념이 성립된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p>
<p>'동시' 혹은 '아동문학'은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다. 근대의 공교육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가 자라 어른이 되는 것처럼, 하나의 장르도 탄생하고 성장하며 새롭게 거듭난다. '동시'와 '아동문학'도 마찬가지다. 시작은 교육이었지만 현재의 위치는 다르다. 경험적 특수성을 지닌 미학이 아니라 태생적이며 본래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성을 지닌 장르로 정착하고 있는 중이다.</p>
<p>복잡하게 보이지만 사실이다. 영화로 예를 든다면 '어린이용 영화'로 출발한 애니메이션이 이제는 당당한 예술장르의 하나로 정착한 것과 마찬가지다.</p>
<p>다시 이야기를 <솔로강아지>로 돌려보자. 그렇다면 <솔로강아지>에 수록된 작품들은 '시'인가 '동시'인가. 아이들을 교육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는가? 아니다. 한 작가가 자신의 미적 감수성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나이가 어리면 '동시'이고, 그 작가의 나이가 많으면 '시'인가? 이것도 아니다. 작가의 나이로 작품을 구분할 수는 없다.</p>
<p>그러므로 <솔로강아지>는 '동시집'이 아니라 '시집'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어린이가 쓴 시'이기는 하지만 '어린이 교육용'으로 쓴 시는 아니다.</p>
<p style="margin-left: 30pt">아이는 빛에서 나와 계단으로 내려간다/한 칸마다 하나의 발자국/어둠 속으로 내려간다/얼굴도 손도 다리도 점점 어두워진다 (「사춘기」 전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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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30pt">자고 있을 때/몸속에서 튀어 나온다/또 다른 내가//내가 나를 만나는 순간/나란 존재는 없어져 버린다//뱀이 허물을 벗는다/벗으면 쓸모없어지는 것을 (「나 플러스 나」 전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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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30pt">우리 집에 온 동물들은 다 탈출하고 싶어한다 새 집을 사주고 먹이를 넣어 주어도 햄스터도 달팽이도 소라게도 다 탈출해 전과범이 되었다 어느 날은 꼬리가 긴 이구아나마저도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수박만 남겨놓고 달팽이도 소라게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한 마리는 내게 밟혀죽었고 집으로 돌려보냈던 소라게는 어둠을 틈타 다시 사라졌다 밤마다 요란스럽던 장수풍뎅이를 풀어 주려한 날 아침 그것은 죽어 있었다 우리가 만들어 주었던 집 감옥이었던 집 큰 우주로 돌아가 다시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물들 (「동물 대탈출」 전문)</p>
<p> <솔로강아지>에 실린 시들을 읽어보면 어린이의 감수성이 아닌 성인의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시적 테크닉도 기본 수준을 넘는다. 물론 작품마다 완성도가 다르고, 또 성긴 느낌이 없지 않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맛도 느껴지지만, 작가의 시선 자체는 유의미하다. 이것이 학습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태생적인 특징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어디선가 한번쯤 읽어보았던 느낌이 드는 구절이나 문맥이 있더라도 크게 문제 삼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작가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어차피 모방과 흉내내기를 통해 완성되는 게 예술이 틈璣? 거칠고 황량한 습작기를 거치지 않고 문학가가 된 이가 있을까.</p>
<p>문학작품을 가지고 문학 외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어린이가 쓴 시라고 해서 무조건 '동시'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p>
<p>어린이가 동요를 부르지 않고 가요를 부른다고 탓하는 것은 곤란하다.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한 가요를 멋들어지게 부르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네가 사랑을 알기나 해?'라고 정색을 하며 비아냥거리는 어른이 있다면 바람직한 것일까? 일단 칭찬을 해주는 게 마땅하다. 노래를 멋지게 부르는 테크닉과 타고난 성대를 지녔음을 칭찬하고 격려해야 한다. 그것이 훈련으로 이루어낸 성과인지 아니면 타고 태어난 능력인지는 상관없다.</p>
<p>조금 모자라더라도 그렇게 흉내라도 멋지게 내는 것 자체가 능력이다. 격려하고 칭찬하여 더 훌륭하게 가다듬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p>
<p>시집 <솔로강아지>와 시집에 실린 모든 작품들, 그리고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는 그 나이와 관계없이 존중받아 마땅하다. 윤리와 교육의 잣대로 마음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논란이 된 작품도 그 텍스트 사이를 들여다보면 텍스트가 지시하는 것과는 또 다른 얼굴들이 보이기도 한다. 어차피 문학작품이 아닌가.</p>
<p>권장과 허용의 사이를 넘나드는 게 문학이고 예술이다. 권장할만하지 않다고 해서 허용하지 않는다면 죽은 사회가 된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회, 열린 사회가 되려면 권장하지는 못하더라도 허용해주는 관대함과 너그러움이 필요하다.</p>
<p>내 생각과 다른 생각이라면 나는 그것을 권장할 생각이 전혀없다. 그러나 누군가 그것을 억압한다면 나는 그것을 허용하라고 나서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p>
<p>시집 <솔로강아지> 논란을 보며 씁쓸함을 느끼는 이유다. 나와 혹은 우리와 다른 것들을 허용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이는 주변의 딱딱함이, 더 잔혹한 것이 아닐까.</p>
한경닷컴 문화레저팀 이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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