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유럽 주도 세계은행·IMF서…중국, 금융 변방 취급 받아
AIIB·신개발銀·SCO 등 中, 독자적 국제기구 설립해
세계 금융 판도 바꾸려 노력…위안화 국제화도 '잰걸음'
[ 김순신 기자 ]
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새로운 국제 금융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44개국 700여명의 대표가 모였다. 회의의 주인공은 해리 화이트 미국 재무부 차관보. 당시 세계 금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에 대적할 나라는 없었다.
화이트는 회의에서 달러 가치를 금 1트로이온스(31.10g)당 35달러로 정하고 기타 화폐는 달러에 가치를 고정시키는 새로운 통화체제와 경제위기국에 대한 자금 제공을 담당하는 국제통화기금(IMF), 개발도상국에 경제개발 자금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은행(WB) 설립을 제안했다. 미국 중심의 금융질서 ‘브레턴우즈 체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71년 미국이 달러에 금태환 중단을 선언하며 브레턴우즈 체제는 붕괴됐지만 IMF·WB를 두 축으로 하는 미국 중심의 금융질서는 지난 70여년간 유지돼 왔다.
최근 IMF·WB 체제는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그 중심에는 4조달러에 육박하는 외환보유액을 기반으로 ‘금융 굴기’(세계 금융질서에서 우뚝 선다)에 뛰어든 중국이 있다.
중국은 위안화 국제화를 통해 기축통화인 달러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 자국 주도의 국제 금융기구에 세계 각국을 끌어들여 IMF와 WB를 견제하려 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의 돈 자석이 미국 우방까지 끌어당기고 있다”며 “AIIB의 출범은 21세기 권력 이동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3대 은행으로 IMF·WB 체제 넘는다
중국은 정치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면서 주요 2개국(G2)으로 올라섰다. 중국 경제는 지난 30년간 연평균 8% 넘게 성장해 세계 2위 수준의 경제 규모와 세계 최대 무역국의 위상을 확보했다. 정치적 영향력도 커졌다. 1971년 대만을 대신해 유엔 상임이사국 지위에 올랐고, 세계 2위 군사력을 자랑하며 옛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떠올랐다.
하지만 금융 분야에서는 여전히 변방 국가다. 브레턴우즈 체제를 주도해온 세계은행과 IMF에서 미국 투표권이 각각 15%와 16.8%인 데 비해 중국은 4.1%와 8.3%에 그친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기존 국제금융 체제에서 발언권 확대를 추진해왔지만 미미한 수준의 위상 제고에 머물렀다는 지적이다.
중국은 자국 주도의 국제 금융기구 설립으로 새로운 국제 금융질서 만들기에 나섰다. 중국은 AIIB를 통해 미국 일본이 이끌고 있는 아시아개발은 ?ADB)에 대응한다는 계획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2013년 아시아를 순방하며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구상과 함께 AIIB를 공식 제안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2020년까지 아시아지역에 필요한 인프라 투자 규모가 2900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AIIB는 시 주석이 제안한 지 1년 만인 지난해 10월 베이징에서 인도 파키스탄 등 21개국이 창립멤버로 참여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최근엔 미국의 우방 영국이 참여를 선언하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등도 잇따라 참여의사를 나타내면서 개도국 중심에서 선진국까지 아우르는 국제기구로 출범할 수 있게 됐다. 21일까지 참여를 결정하거나 참여의사를 보인 나라는 중국을 포함, 30개에 이른다. AIIB 창립멤버 국가 수는 1966년 ADB 설립 때 참여한 국가 수(31개)를 넘어설 전망이다.
중국은 목표 자본금(1000억달러)의 절반인 500억달러를 부담해 올해 말까지 AIIB를 출범시킨다는 방침이다. 아소 다로 일본 재무상도 지난 20일 “(지배구조 투명성 등) 조건이 맞으면 일본도 AIIB에 가입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ADB 총재직을 한 번도 내놓지 않은 일본마저 AIIB 가입을 두고 주판알을 굴리기 시작한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주요 7개국(G7) 중 4개국이 AIIB 설립을 지지하면서 미국 유럽 일본과 중국이 대치하는 구도가 완전히 무너졌다”며 “현실적인 시각에서 중국의 구상과 마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앞서 지난해 7월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와 공동으로 개발도상국 지원을 위한 개발은행인 신개발은행(NDB)을 올해 말까지 출범시키로 합의했다.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와 함께 상하이협력기구(SCO)개발은행 창설도 추진 중이다. AIIB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NDB와 SCO개발은행에 참여할 국가도 급속히 늘어날 수 있다.
세계 3대 화폐 추진 중인 위안화
중국은 금융 굴기를 완성하기 위해선 위안화의 국제화가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위안화를 사용하는 국가가 많아질수록 달러 영향력을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7월 국제 무역거래에서 위안화 결제 비중은 8.7%였다. 미 달러가 81.1%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지만 세계 2위의 무역결제 화폐로 올라선 것이다. 위안화로 결제된 무역 규모는 지난해 4조6300억위안으로 2012년보다 57.5% 늘어났다.
중국은 2009년 홍콩에 첫 번째 역외 위안화센터를 세운 뒤 서울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등 세계 12곳에 위안화 청산·결제 은행을 추가했다. 프랑스 파리는 아프리카 무역의 위안화 결제 중심지로 떠올랐다. 중국은 자국 통화와 상대국 통화를 맞바꾸는 통화스와프 협정에도 적극적이다. 중국은 세계 25개국과 3조위안(약 534조원)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맺었다.
인민대 국제화폐연구소는 “위안화가 2020년 이전에 영국 파운드화나 일본 엔화를 뛰어넘어 달러화·유로화에 이은 세계 3대 통화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은 IMF 특별인출권(SDR) 통화 바스켓에 위안화를 편입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위안화의 국제화를 위해선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FT는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선 자유로운 통화 이동이 보장돼야 한다”며 “위안화는 중국에서 해외로 나가는 데 제약이 많을 뿐 아니라 달러와 바꾸는 것도 규제를 받는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이어 “중국이 위안화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불투명성을 해결하기 위해 자유변동환율제 도입을 검토 중이지만 성공 여부는 미지수”라며 “위안화가 달러의 위상을 따라잡는 데는 최소 30년의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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