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장수기업
국내 유일 최고 타이틀만 5개
최초 등록상표·최장수 상장사
급체 등 효과 '국민소화제'
본사 터 독립운동의 거점
임시정부 행정기관 자리잡아
초대사장 등 3명 독립운동가
[ 김형호 기자 ]
동화약품(회장 윤도준)은 국내 제약 역사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제약업체다. 1897년 창업한 이래 117년 동안 같은 상호와 ‘활명수’라는 동일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백년 기업이다.
국내 최초의 등록상품인 ‘활명수’를 비롯해 최초의 등록상표 ‘부채표’, 국내 최초의 제조회사 및 제약회사 등 4개 부문에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여기에 국내 최장수 상장기업 기록까지 더하면 ‘최고(最古)’ 타이틀만 5개를 갖고 있는 국내 유일의 업체다. ‘동화(同和)’는 주역의 ‘二人同心 其利斷金(이인동심 기리단금·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예리함이 쇠도 자를 수 있다)’에서 ‘동(同)’자를 취하고, ‘時和年豊 國泰民安(시화연풍 국태민안·나라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평안하다)’에서 ‘화(和)’자를 따와 만들었다. ‘민족이 합심하면 잘살 수 있다’는 민족정신에 가치를 둔 창립이념이다.
대한민국 기업과 브랜드 역사의 시작, 활명수
동화약품 성장의 원동력은 기업 창립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과 활명수(活命水)라는 우수한 제품에 기반을 두고 있다. 대한제국 원년인 1897년, 궁중 선전관 민병호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양약인 ‘활명수’를 개발, 이를 대중화하기 위해 아들 민강(동화약품 초대 사장)과 함께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을 창업했다.
민병호 선생이 활명수를 제일 먼저 개발한 것은 당시에는 소화불량이 가장 흔하면서도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병이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당시 약을 구하기 힘들어 급체, 토사곽란 등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효과가 좋으면서 복용이 간편한 활명수(活命水)는 그 이름처럼 ‘생명을 살리는 물’로 민간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연간 1억병 이상 팔리는 활명수의 장수 비결
일찌감치 연구개발에 힘을 모은 경영 전략은 100년 기업의 밑거름이 됐다. 윤광열 명예회장은 1970년대 안양공장과 중앙연구소를 신축하는 등 이익 재투자에 집중했다. ‘민족기업’이라는 간판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 인식 속에 신약 개발과 효율적인 생산시스템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동화약품의 역사와도 같은 활명수는 출시 초기 경쟁사들의 무수한 유사 제품에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 남았다.
1967년 ‘까스활명수’를 개발해 콜라에서 느끼는 청량감을 선사했고, 1989년에는 ‘까스활명수-큐’를 통해 브랜드를 업그레이드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캠페인을 10년 넘게 벌인 결과 연간 1억병을 생산하고 시장점유율 70%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활명수가 117년간 ‘국민 소화제’로 자리잡은 것은 뛰어난 약효를 바탕으로 소비자의 욕구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브랜드 차별화에 힘쓴 결과로 평가받는다.
독립운동가 3인 배출한 독립운동의 거점
동화약품은 국내 독립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화약품 본사(서울 중구 서소문로9길 14)는 일제 치하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국내외를 연결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 비밀행정기관 ‘서울 연통부’가 있던 장소다. 서울 연통부 행정 책임자는 민강 동화약품 초대 사장이 맡아 국내외 연락을 물론 국내 정보활동 등을 담당했다. 서울 연통부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항일 의거 유적지로 선정돼 기념비가 건립됐다. 이듬해 광복절에 제막한 기념비에는 서울 연통부의 활약상과 설립 의의 등이 상세하게 포함되어 있다.
민강 초대 사장을 비롯 윤창식 5대 사장, 윤광열 명예회장 등 역대 경영자 3명이 독립운동가다. 독립운동으로 사세가 기울어 경영이 어려워지자 5대 보당 윤창식(1890~1963) 사장은 경제 자립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조선산직장려계’를 결성했다. 이 때문에 옥고를 치른 후에도 빈민 계층을 도운 ‘보린회’ 사업을 해방 이후인 1959년까지 40년간 지원했다.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에도 많은 지원을 펼치는 등 나라 독립에 남다른 열정을 바쳤다. 윤창식 사장의 대를 이어 7대 사장이던 윤광열(1924~2010) 명예회장은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보성전문학교 재학시절, 자발적으로 중국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가 주호지대 광복군 5중대 중대장을 맡았다.
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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