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미 기자의 경제 블랙박스
성장률 전망은 '확률의 게임'
경제 불확실성 모두 반영 못해
"전문가 지적 유희 경계해야"
[ 김유미 기자 ] ‘거시계량모형의 흐름도를 확대복사해 책상 위에 둔다. 북한 미사일 발사, 환율 급등 같은 충격이 발생했다고 상상해본다. 연필을 들고 이때 소비는 어떨까, 수출은 어떨까 파급효과를 화살표로 그린다. 50번쯤 반복한다. 머릿속에 그림이 딱 떠오를 때까지.’
한국은행에서 20여년간 경제예측 작업을 해온 한 베테랑의 비법이다. 복잡한 경제현상을 예측하려면 첨단 수식도 중요하지만 ‘감각’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앞선 경제모형을 갖췄다는 한은 조사국 직원들은 모두 비슷한 훈련을 거친다. 그 노력의 성과가 1년에 네 번 나오는 경제전망 보고서다.
지난 15일 보고서는 올해 한국 경제가 3.5%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7월 전망치 3.8%에서 크게 후퇴한 터라 이번에도 ‘한은은 왜 번번이 틀리나’ 비판이 나왔다. 고가의 슈퍼컴퓨터를 돌리는 게 더 낫겠다고 비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한은 일각에서는 사람들의 오해를 지적하기도 한다. 사실 한은이 제시하는 연 3.5%라는 숫자는 수식의 정답 같은 것이 아니다. 한은 관계자는 “3.5%는 실현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최빈값(가장 빈도가 높은 값)일 뿐”이라며 “그대로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낮고 오차도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즉 ‘확률’의 문제다.
실제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위원들의 경제전망치를 ‘3.5~4.8%’식의 범위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예측범위가 넓어 의미가 없다.
따라서 한은을 포함한 중앙은행들이 최근 선택하는 방식은 ‘팬차트’다. 여러 변수에 따른 성장률 경로를 보여준다. 한은이 제시한 내년 성장률의 팬차트(그림)를 보면 전분기 대비 1% 구간이 짙게 표시돼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아래 희미한 구간은 가능성은 작지만 가능한 경로다. 모든 변수가 유리할 때는 전기 대비 2%까지 가능하지만 최악일 때는 마이너스 성장도 있을 수 있다. 부채꼴의 아래 구간이 더 넓은데 하방위험(투자심리 회복 지연, 세수 부족 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은이 제시한 내년 성장률은 연간 3.0~4.7%다.
간단한 그림이지만 슈퍼컴퓨터는 그릴 수 없다. 확률 분포는 상·하방 리스크에 대한 ‘주관적 판단’이 모형에 입력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연륜과 경험이 결국 중요하다. 박양수 한은 거시건전성연구부장은 경제전망 작업을 ‘직관과 모형의 종합예술’이라고 말한다.
그가 낸 같은 제목의 책(2011년, 한티미디어)에선 주관성의 위험도 지적한다. 특히 정치적 판단이 숫자에 들어갈 경우다. 예컨대 정책당국은 재정계획을 수립할 때 성장률 전망치를 제시한다. 작업 결과 전망치가 잠재성장률보다 크게 낮게 나왔다고 해보자.
이대로 공표하면 언론에서 ‘정부가 성장을 포기했다’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성장률 전망치를 ‘목표치’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국이 전망치를 잠재성장률 수준으로 조정해 발표한다면 세수를 낙관적으로 잡았다가 그만큼 못 걷어 국가 빚이 늘어날 수 있다.
숫자를 잘 맞히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얘기다. 정책당국이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관건인 셈이다. 박 부장이 “소통하지 않는 경제전망 수치는 ‘전망 기술자들의 지적 유희’에 그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warmfron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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